전문가 설문조사에서 조선 27명의 왕 가운데 대다수가 최악의 왕으로 인조를 지목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가 광희문을 통해 피신

 

도성을 따라가는 여정에 다시 불을 지핀다. 길은 여정을 재촉하고 생각을 따라서 발길이 이끌린다. 올곧지 못한 시가지를 헤적이는 동안 행여 기대했던 도성 흔적은 어김없이 기대가 일그러지고 차량 소음과 함께 매연만 풀풀 흩날릴 뿐이다.

광희문 / 한양도성 제공
광희문 / 한양도성 제공

광희문光熙門과 더불어 또렷한 도성의 실체가 짧게나마 드러난다. 퇴계로에서 주택가 쪽으로 다소곳이 물러나 있는 광희문은 도성 내의 시신이 동쪽으로 지날 때 통과했다 하여 시구문屍口門 또는 부정문不淨門으로 불렸다.

광희문과 관련하여 명예롭지 못한 역사적 사건이 인조仁祖 집권 시기에 일어났다. 이괄李适의 난을 일으킨 무리들이 도주할 때 광희문으로 나갔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가 광희문을 통해 피신하였다

광해군은 대외 정책에서 중립외교를 통해 실리를 얻었지만, 인조는 동북아의 헤게모니를 쥔 후금(청淸나라 전신)을 철저히 무시한 대신 멸망해 가던 명明나라만 사대한 결과 병자호란을 자초하였다. 인조는 청 태종太宗이 군대를 몰고 직접 한양으로 쳐들어오자 대책 없이 갈팡질팡하다가 광희문을 통해 허둥지둥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다음 결국, 삼전도에서 치욕스러운 항복의 대가를 치름에 따라 역사상 씻지 못할 오욕을 남겼다.

일본이 일찍 문호를 개방하고 근대화에 박차를 가해 국력을 키웠다면, 인조는 청나라를 통해 서구의 신문물이 들어오는 기회를 차단하는 결과를 만든 장본인이 되었고 이후 조선의 국력이 쇠퇴하면서 일본과의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전문가 설문조사에서 조선 27명의 왕 가운데 대다수가 최악의 왕으로 인조를 지목하였다. 역사는 가정이 어렵겠지만, 광해군의 퇴장을 역사의 수레바퀴로 돌이킬 수 있다면 우리의 운명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치욕의 역사를 뒤로 하고 도성 따라가기가 계속된다. 주택가에서 도성 흔적은 도무지 가늠이 안 된다. 길바닥에서 ‘한양도성’이라 새긴 금속판만이 간혹 나타나 길라잡이가 되어줄 뿐이다. 성북동 뒷골목에 가려졌던 도성은 그나마 담장이나 축대의 밑돌에서 흔적으로 남겨주었지만, 신당동 골목의 한양도성은 광희문이 기억하는 불명예 오욕을 피하고 싶었는지 머리카락마저 보이지 않게 꼭꼭 숨어버렸다. 씁쓸했던 생각들은 신당동성당을 넘어 넓은 길에 이르러 맑은 빛이 쏟아지고 나서야 바로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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