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만의 명상을 가지고 집을 나선다. 차창 밖으로 듬성듬성 흰 눈으로 뒤집어쓴 풍경이 들어온다. 마곡사 어귀에 이르니 곱게 차려입은 일주문一柱門이 맨 먼저 반긴다.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泰華山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대한불교 조계종산하 마곡사麻谷寺는 천년 고찰인 만큼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둘러볼 수 없다. '마곡'이란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봄볕에 생기가 움트는 마곡사의 태화산은 나무와 봄꽃들의 아름다움이 빼어난 곳이다.

오르막으로 내어주는 까만 아스팔트 위로 새벽에 내려앉은 하얀 눈이 소복하게 깔려있다. 듬성듬성 찍힌 발자국이 앞서간 사람들의 흔적을 대신한다. 멀리서 보면 검은 바탕에 하얀 꽃무늬를 두른 고급스런 대리석 같다. 멋진 분위기에 나 홀로 취해 걷다 보니 어느덧 무명의 정자가 내 발길을 가로막는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몸 사이를 비집고 겨울바람이 시원스레 파고든다. 잠시 쉬는 동안에도 송림의 은은한 향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백범 김구 선생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백련암에 이르러 시원한 석간수 한 모금으로 목마름을 채운다. 물 한 모금에 갈증이 해소되고 나니 정신이 맑아진다. 선생께서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군 중좌를 처단한 이유로 복역하던 중 탈옥하여 이곳 백련암에 은신했다. 그 인연을 잊지 않고자 광복 후 1946년 마곡사를 다시 찾아와 경내에 향나무를 심었다. 그때 심은 향나무가 70여 년 세월을 지키며 오롯이 서 있다. 선생의 고고한 인품을 심어놓듯 태화산 자락에는 마곡사 솔바람길이 조성되었다. 이름하여 '백범명상길'이다. 평소 존경했던 선생을 그리워하며 불자가 아닌 불자의 마음으로 백련암 한 바퀴를 둘러본다.

계곡을 타고 흐르는 맑은 물소리와 바람이 지나가는 풍경소리만이 암자를 채운다. 무념의 생각으로 무장한다. 문명마저 배제된 무욕의 쾌감에 빠지는 동안 상큼한 고독이 밀려온다. 산을 찾을 때마다 허욕 하나라도 털어버릴 수 있다면 좋으랴. 이를 쉬이 떨치지 못하니 삶의 짐이 무거운 지지도.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산길에는 세월을 짊어진 아름드리 늙은 소나무가 철갑을 두른 듯, 그 위용을 자랑하며 어린 소나무를 호위하며 나잇값을 하고 있다. 양옆으로 나무들이 에워싼 길로 접어드니 쌀쌀한 삭풍은 온데간데없고 봄 같은 아늑한 온기가 느껴진다. 땅속은 이미 긴 동면을 끝냈을지도 모른다. 이제 뿌리는 부단하게 꿈틀거려야 나무는 환생과 부활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인공人工이 배제되어 있는 키 작은 나뭇가지 위에 흰 눈가루가 걸터앉은 채로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젊은 연인들'의 노래 가사처럼 다정한 연인의 손을 잡고 달곰한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젊은 날의 달달한 기억들이 끊긴 필름처럼 지나간다. 가슴에 방망이질하던 추억 하나를 끄집어내어 들여다보니 쓴웃음만 나온다.

겨울 산은 자연의 속살을 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고 있으면 여름날 울창했던 신록의 빈자리를 발견하게 된다. 헐렁한 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먼 산의 정취는 겨울 산에서만 볼 수 있는 특권이다. 계절마다 변신을 거듭하는 산은 나름대로의 조건 없는 별미를 제공한다. 산 마니아들에게 베푸는 고마움은 높고 낮음이 없이 빛깔과 향기를 전해주고 있다. 인간은 산이 없었다면 자연의 아름다움조차 망각하며 팍팍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오랜 세월 속에서도 고혹적인 자태를 잃지 않은 영산전이 눈길을 끈다. 영산전의 현판은 조선 시대 세조가 남긴 글씨이다. 세조가 왕위 찬탈로 인해 실망과 실의에 빠진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을 회유하러 마곡사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함이 애석해 영산전 현판과 자신이 타고 온 가마를 남겨두었다고 전한다. 당시의 현판은 사라졌지만, 책을 불사르며 울부짖던 김시습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했던 세조의 안타까운 심성이 현판 글씨에 그대로 묻어있을 듯하다.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올해 첫 절기인 입춘이 지나면 눈이 녹아 비나 물이 된다는 우수雨水가 다가올 터이다. 오늘 마곡사에서 만난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는 말 또한 봄의 아름다움이 마곡사만 한 게 없다는 얘기이다. 마곡사의 봄 풍경이 벌써 그리워진다.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저작권자 © 이치저널(each journal)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