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강의 절벽이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후추를 뿌린 듯한 검은 입자들이 암석 사이사이에 스며 있고, 썰물에 드러난 솔섬의 바위에서는 포도송이처럼 둥글게 응집된 덩어리가 빛을 드러낸다. 변산반도에 오래 잠들어 있던 화산의 흔적 두 곳이 마침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며, 한반도 중생대의 비밀이 새롭게 열리고 있다.
국가유산청은 ‘부안 격포리 페퍼라이트’와 ‘부안 도청리 솔섬 응회암 내 구상구조’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두 지질유산은 모두 후기 백악기 화산활동의 결정적 증거이자, 변산반도의 지질 역사를 해석하는 데 핵심이 되는 현장들이다.
격포리 페퍼라이트는 변산반도 서쪽 끝 적벽강 절벽을 따라 좁게 이어지는 약 1m 두께의 독특한 암석층이다. 이곳에서는 상부의 화산암층(곰소유문암층)과 하부의 퇴적암층(격포리층)이 물리적으로 섞여 굳어버린 모습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페퍼라이트라는 이름은 화산암과 퇴적암이 마치 ‘후추(peper)’가 흩뿌려진 듯 섞여 보이는 데서 비롯되는데, 뜨거운 용암이 아직 굳지 않은 습한 퇴적물을 통과하면서 순간적인 열폭발과 수증기 팽창이 일어나 두 종류의 암석이 파편처럼 뒤섞이는 과정이 핵심이다.

이 지점은 그 형성과정이 손에 잡힐 듯 드러나는 드문 사례로, 층 경계를 따라 얇게만 발달하는 일반 페퍼라이트와 달리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두꺼운 규모’로 나타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즉, 이곳은 고대 해안 환경을 대규모로 흔든 화산 활동의 실시간 기록지이며, 당시의 퇴적 조건과 화산열 작용이 동시에 관찰되는 자연 교과서다.

솔섬의 구상구조 역시 희소성과 학술적 가치가 크다. 솔섬은 변산면 소재지 남서쪽의 작은 섬으로, 물이 빠지는 시간에만 육지와 연결되는 독특한 지형을 가진다. 섬의 이름은 상부에 자리한 소나무 숲에서 비롯되었고, 낙조 사진 명소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진짜 보물은 섬 하부 암석에서 나타나는 구상구조다.

마치 포도송이가 붙어 있는 듯한 둥글고 반복적인 덩어리 구조가 응회암 내부에서 대량으로 관찰되는데, 이는 뜨거운 열수(광물이 녹아 있는 고온 용액)가 응회암을 가로지르며 철산화물을 침전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응회암이 완전히 굳기 전에 일어난 이 광물화 작용은 세계적으로도 기록이 많지 않으며, 그 규모·형태·집중도에서 솔섬은 지질학적으로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두 지역이 지닌 지질적 의미는 단순한 암석의 특이성에 그치지 않는다. 변산반도에서 확인되는 화산활동, 퇴적환경, 열수 작용이 서로 어떤 지질적 순서로 얽혀 있었는지—즉 ‘중생대 변산 지질 시스템’의 큰 그림을 그리는 데 필수적 단서가 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페퍼라이트는 용암-퇴적물의 즉시 접촉과 혼합을 보여주는 ‘사건의 흔적’이고, 솔섬 구상구조는 응회암이 굳어가는 동안 열수의 영향이 어떻게 암석 내부를 재조직했는지 보여주는 ‘후속 변화의 기록’이다. 이 둘은 시기·환경은 다르지만 하나의 지질적 역사 흐름 속에서 서로 보완적인 의미를 지닌다.
지역적 파급효과도 크다. 이미 적벽강과 솔섬은 여행객과 사진가들에게 이름난 장소지만, 천연기념물 지정은 보전과 활용을 정교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지질유산의 가치는 ‘잘 보존된 현장’이라는 전제 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탐방 동선, 안내 표지, 촬영 제한, 드론 운영 기준, 조석 시간 안내 등 세부 관리 계획이 뒤따라야 한다. 특히 솔섬은 썰물 시간대 외 접근이 어려워 안전사고 가능성이 있어 조석 정보표시와 접근 구역 설정이 필수다.
반면 올바른 보존을 전제로 한다면, 이 두 지역은 지역 교육·지질 탐방·생태 여행의 중심 거점으로 성장할 수 있다. 학교 현장학습, 시민 지질해설 프로그램, 지질사진 공모전, VR 콘텐츠 제작 등 활용 방식은 다양하다. 변산반도의 지질학적 매력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 지질관광 네트워크와 연결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국가유산청은 앞으로 이들 지질유산을 체계적으로 조사·보존하고, 과학적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는 활용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8,700만 년 전 화산의 흔적과 바다가 남긴 시간의 흔적이 만나는 현장 — 격포리와 솔섬은 이제 정식으로 우리 곁에서 보호받는 지질유산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