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로 전날의 날씨 예보에 사로잡힌 관계로 비가 내리면 긴 하루의 여정이 심란하고 복잡다단하겠다는 기우가 앞서는 아침이다. 하지만 작정하고 막상 집에서 나서자마자 휘날리는 눈발 퍼레이디 대반전에서 숨길 수 없는 카타르시스가 일렁인다. 몸으로 맞는 눈으로 치면 사실상 올해 들어 첫눈이며 기억할 수 없는 언젠가에 이런 눈쯤은 맞았을지언정 생에 처음 맛보는 행운 하나 잡은 듯 양천향교 전철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뿐하다.
전철역에 내렸을 때 눈은 이미 사라지고 하늘의 모습은 평범한 겨울철 민낯에 불과하다. 말을 타고 지나는 사람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조선 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놓은 하마비가 길가에 서 있다. 하마비는 왕 또는 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놓고 이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인데, 이곳에는 공자의 정신을 기리는 양천향교가 있어 하마비가 세워졌다.

겸재정선미술관에 이르러 결국 겸재에 관한 이야기가 문화해설가 박석환 님의 설명으로 시작된다. 올림픽도로 변 궁산근린공원 기슭에 포근하게 자리를 잡은 우리 미술의 자존심 겸재정선미술관은 겸재 선생께서 말년에 양천현령으로 재직하면서 경교명승첩, 양천팔경첩, 연강임술첩 등의 걸작을 남겼던 문화의 산실이다. 이곳 미술관에서는 겸재 연구 자료를 조사한 성과물을 축적하고 교류를 도모하여 연구 학술지를 발간하는 등 겸재 연구의 중심 허브를 지향하고자 하는 철학을 구현하고 있다.
선생께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집안 대대로 몹시 가난했던 처지를 벗어나고자 생계 목적으로 20세에 도화서의 화원이 되기 위해서였다. 시작은 중국 남화를 그리다가 30세 무렵부터 겸재만의 산수에 대한 실물이나 경치를 있는 그대로 그린 다음 진경산수화의 종화에 이르렀다.
진경산수화는 고려에서 조선 중기에 걸쳐 그려진 실경산수화의 전통을 토대로 하여 발전한 것으로, 금강산과 영남지방 및 서울 근교 일대에서 선생만의 방식으로 활동한 작품은 산천의 특색을 남종화법 바탕으로 표현한 높은 회화적인 특성과 함께 새로운 화풍을 창안한 것으로서 겸재 정선이야말로 우리 미술계의 화성이라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겸재정선미술관과 산자락을 공유하는 나지막한 궁산으로 오르기 위해 실내에서 빠져나온다. 짧은 시간에 겸재에 관한 많은 자료를 주입하느라 부하가 걸린 머리를 식힐 겸 산이라기보다는 공원 산책이 더 어울리는 경사진 포장길을 유유자적 아늑하게 오른다. 산 이름은 산자락에 양천향교가 있어 공자孔子의 위패를 모시기 때문에 궁(宮)으로 여겨서 궁산이라는 명칭이 유래된 것이다. 궁산 주변에는 개화산, 탑산, 쥐산 등과 더불어 수려한 한강 변을 끼고 있어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곳으로 찾았다 한다.
흩어져서 올랐던 일행들이 미처 녹지 않은 하얀 눈이 주단으로 깔아놓은 듯한 너른 터를 갖추고 한강을 바라보며 세워진 소악루 앞으로 자연스럽게 몰려들고 겨울 햇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해설사의 해설이 준비된다. 겸재 선생은 이곳 산정에 세워진 소악루小岳樓에서 한강의 풍광을 주제로 뛰어난 산수화를 남겼다. 소악루에서 한강을 조망하면서 지금은 과학의 힘을 빌려 인공으로 조성된 각종 산업화의 산물이 풍경을 가로막고 있지만 300년 전 당시 선생께서 거침없이 펼쳐지는 풍광을 보며 작품을 만들었을 상황을 나름대로 상상한다.
궁산에는 감상적이고 이상적인 낭만이 있는 반면에 과거 임진왜란 때 의병과 관군이 진을 치고 왜적에 맞서 싸웠던 아픈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최근에 옛 산성터를 발굴하는 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한편, 이 지역을 궁산근린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이렇게 궁산은 미술, 유적, 풍류라는 3박자를 동시에 즐기고 학습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맛집 또한 즐비하다고 알려졌다.
궁산에서 내려와 보수 중이라 출입이 곤란한 양천 향교 계단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해설이 이어진다. 서울에 남아있는 향교 가운데 유일한 양천향교는 조선 태종 12년에 창건되었으며, 지역의 청소년과 일반인에게 한문과 서예 그리고 사군자를 가르치며 청소년의 인성교육 및 전통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양천향교는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에 공자에게 제사 지내는 석전제를 치르고 있다 한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걸쳐 국립 지방 교육기관 역할을 했던 조선의 향교鄕校는 각 고을에 있는 문묘와 그에 속한 학교로 구성되며 고려 시대 향학을 이어받은 기관이다. 향교는 중앙의 사학(四學/동학, 서학, 남항, 중학)과 같으며, 향교에 들어가야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소과에 합격하면 생원과 진사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대과(문과)에 급제하여 관리의 길을 나갈 수 있었다. 갑오개혁 이후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완전히 이름만 남아있을 뿐 문묘의 제사만 지내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점심을 마치고 쉬엄쉬엄 걸어가 허준이 태어났던 당시 조선의 양천이었던 서울 강서구에 2005년 개관한 허준박물관으로 향한다. 박물관에는 허준에 관한 역사적 활동이나 당시 일반 중인들에 대한 의상 등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자료가 넘쳐난다. 우리나라 의학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긴 허준은 조선 시대 선조와 광해군의 건강을 책임지는 어의를 맡은 바 있으며, 어떤 질병도 척척 고쳐내는 당대 최고의 의사였다. 특히, 허준이 집필한 '동의보감'은 모두가 인정하는 동양 한의학의 상징이며 '허준'과 '동의보감'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나아가 '소설 동의보감'은 밀리언셀러와 스테디셀러이며, 드라마 '허준'이 방영되면서 당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였으니 허준에 대한 기록 쓰기는 가이 없을 정도이다.

허준박물관 인근의 허가바위는 석기 시대 사람들이 조개와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천연 바위 동굴인데, 올림픽대로가 놓이면서 강가에서 육지로 변했다. 이 동굴은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이 태어났다는 설화와 함께 양천 허씨의 근원지로 부른다. 이곳은 우리 민족의 전통 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저자 허준이 그 책을 집필했다고 알려졌으나 현장에서 직접 확인한 바와 같이 지대가 낮아 강물이 수시로 내습하였을 것으로 추측되어 집필 장소로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 납득이 간다.
서울 강서구에는 겸재정선미술관, 양천향교, 소악루, 양천고성지, 허준박물관, 풍산 심 씨 문정공파 묘역 등의 사적지가 동네 곳곳에 있음에도 필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까닭은 지금까지 이곳이 다른 지역에 비해 친숙하지 못하고 무관심에서 기인한 낯섦인데, 오늘에서야 새로운 사연 하나하나를 파헤쳐봄으로써 뜻밖의 숨겨진 참모습이 화수분처럼 넘쳐 나온다.
올림픽도로를 육교로 횡단하여 본격적인 걷기로 돌입한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아른아른 솟아 나는 해맑은 물빛이 보석처럼 반짝이며 눈부시도록 황홀하다. 강변에는 눈이 시리도록 찬란했던 가을 색을 지우고 겨울이 무르익어가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물가 가장자리에 잎이 진 나무들이 잔잔하게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따라 살랑살랑 흔들며 여유로운 휴일을 즐긴다. 한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속절없이 키 큰 미루나무 대신 키 크기를 포기한 은빛 갈대가 양지바른 구석에서 여린 솜털을 흔들며 이방인들을 반기는 등 인공의 간섭 없이 자연에 맡겨진 어울림의 하모니가 눈물겹도록 이 계절의 서정을 써가고 있다. 멋진 풍경 하면 한강 변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를 지금 이곳에서 찾는다.
오르내림이 없는 평탄한 길이라도 물길 모양대로 구불구불한 강변을 걸으면 지루할 틈이 없고 휘어진 모퉁이를 틀 때마다 시선이 따라가기 분주하게 다양한 수변 경관과 마주하며 계절의 정취에 흠뻑 취하게 된다. 물은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호수처럼 넉넉하게 담은 물길을 거슬러 가면 마치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지 모른다. 지나온 인생이 경험한 만큼 보인다면 여행은 걸은 만큼 느끼고 스스로 만족해하는 행복한 여정일 것이다.
한 방향의 한강 변을 따라가다 한강공원 염창나들목에 설치된 휴게 데크에 이르러 잠시 멈추자 누군가에 의해 강 건너편 노을공원과 하늘공원에 관한 이야기 주제가 펼쳐지고 노을공원 예찬이 줄을 지으며 나온다. 바로 전 겸재미술관에서 정선 작품 영인본 124점에 나온 '금성평사'의 작품은 노을공원의 옛터인 난지도를 배경으로 당시 양천 현아 망호정에서 바라보며 그린 겸재선생의 올바르고 변환 없는 중용의 삶을 나타내는 불후의 명작이다. 금성의 모래펄이라는 금성평사는 홍제천과 모래내에서 유입된 고운 입자가 만든 모래톱이 난지도 일대를 형성했던 점과 모래섬 뒤에 금성산이 자리하였기 때문이다.
난지도는 1977년 이후 꽃과 나비가 만발하던 천혜의 섬 주변에 둑을 쌓고 쓰레기 매립장을 조성하여 수도권에서 쏟아져 나온 오만가지 오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밋밋했던 평지가 100m 높이로 쌓아져 오염의 아이콘이 되었다. 지금은 완전한 쓰레기 매립장을 환경친화적으로 재개발하여 유채, 개나리와 해바라기를 벗으로 삼고 걷기 편한 산책로와 더불어 드넓은 평원에서 펼쳐지는 은빛 억새와 함께 저무는 황금 낙조에 이르기까지 과거 처절했던 사연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서울시민들로부터 사랑받는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으로 각각 거듭 태어났다.
한강과 안양천이 만나는 합수부이다. 안양천은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청계산 서남쪽 계곡과 백운산에서 각각 발원하여 이곳 한강과 만나게 되는데, 서울 한강의 지류 가운데 중랑천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고 한다. 또한, 서울 강서구와 영등포의 경계를 이루는 합수부는 단지 물의 만남을 더해 서울둘레길의 한 분기점이며, 한강 변과 안양천을 산책하거나 라이딩하는 단체들에 만남의 광장과 휴게 기능은 물론이고 각종 운동 시설을 갖추고 있어 늘 이용자들로 북적대는 곳이다.
다시 걸음이 시작되자마자 멀리서 오렌지색 형태의 성산대교가 시야에 들어온다. 지은 지 40년 가까이 된 교량이 분별하기에 다소 먼 거리임에도 예술적 구조로 설계한 트러스교의 멋이 느껴진다. 한강과 바로 맞닿은 가장자리에 설치된 가드레일에 의지하며 당산역을 목적지로 걸어가는 인도는 자전거길과 턱을 두고 있어 오가는 자전거 접촉 사고로부터 더욱 안전할 수 있다는 편안함과 함께 간간이 등 뒤에서 떠밀어주는 북서풍까지 더해져 걷는 동안 아늑함이 밀려온다.
겸재정선미술관에서 겸재의 대표적 작품 설명을 들었던 선유봉이 양화대교의 또 다른 이름인 제2한강교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길목에서 기다린다. 지금의 선유도는 과거 겸재의 작품 선유봉에서 연유되었는데, 신선이 노는 봉우리라는 뜻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질 만큼 수려하여 한강의 절경 가운데 으뜸으로 쳐주었다. 선유봉은 금빛 모래밭과 강변의 버드나무 숲에 꽃이 피면 장관을 이루고 한강에 비친 달과 선유봉을 보며 감탄을 금하지 못할 정도로 명성을 크게 얻었다 한다. 겸재 선생 또한 자신이 거처하던 방문을 열면 바로 마주하는 선유봉을 보며 한 점 외로운 산이 날아가다 강가에 떨어진 듯하였다며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선유봉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개발로 인해 석재원으로 이용되고 1965년 현재의 양화대교가 건설되면서 실물에 가까운 봉우리는 겸재 선생의 작품만 남기고 과거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 서울시의 수돗물을 공급하는 정수장으로 사용되다가 필자가 지척의 거리로 이사 온 때와 맞물린 2002년 초에 선유도공원으로 거듭났는데, 산업화 과정의 산물인 콘크리트와 철재 급수관의 일부를 그대로 남겨둔 채 과거와 현재, 개발과 보존이라는 시공時空의 경계를 허물며 더불어 공존하는 선유도생태공원으로 면모를 쇄신하였다.
당산역이 더욱 가까워지고 필자에게 일상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익숙한 공간으로 들어온다. 필자가 이 길을 무수히 걸었다 할지라도 계절이 바뀌거나 함께하는 길동무에 따라 느낌이 새로워지는 건 당연할 것이다. 일행과 함께하는 오늘만의 한강 걷기가 여는 때와 다르게 다가오는 까닭은 어쩌면 무술년 한강 갈무리 기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시각적時刻的 의미를 떠나 겸재 정선과 구암 허준의 흔적을 찾아가 문화해설가가 들려주는 현상을 통해 본성을 깨달으며 여행기를 쓸 요량으로 나서는 기대가 들어서이다.
여행기를 쓰기로 작정하고 한강 변을 따라 걷는 동안 시민들의 아늑한 휴식처 제공과 생기 넘치는 한강만의 분위기를 맛볼 수 있었으며, 특별하게 겸재 정선과 구암 허준의 진목면에 대해 진지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게다가 문화해설가 박석환 님의 거침 없고 박학다식한 해설이 보태져 자랑스러운 정선과 허준에 대한 흔적을 살펴봄으로써 걸출한 두 선생께 한 걸음 더 다가갔다는 만족감이 밀려온다. 또한, 서울 강서구 하면 세간의 관심이 동떨어지고 '도시의 변방'이라는 그릇된 선입견을 이번 기회에 보기 좋게 반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곳만의 고귀함과 고풍스러운 멋으로 꼭꼭 숨어있다가 깜짝 선물로 다가옴을 비로소 발견하는 의미 깊은 하루였다.
시간은 한 해의 끝자락을 향해 쉼 없이 떨어지며 나무는 아낌없이 버려야 아름답게 다시 태어난다는 순리를 깨닫고 하루가 다르게 변신을 거듭하며 동면에 들어갈 채비를 마친 듯 지나온 추억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자연은 계속하여 멈추지 않고 시시각각 새로운 분위기로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할 것이며 운이 좋으면 머지않아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눈부신 은세계 한 편을 보여줄 수 있기에 겨울을 나는 길목에서 을씨년스러운 잿빛 하늘의 황량함마저도 마냥 아름답게 기꺼이 보듬어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