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살아있는 역사 공간 정동길

한양도성을 따라가는 경로와 다소 벗어난 데에 조선 시대 사소문의 하나였던 소의문昭義門의 표지석이 자리한다. 소의문은 ‘옳은 것을 밝힌다.’ 또는 ‘덕과 의를 숭상한다.’라는 의미와 함께 다른 이름으로 서소문西小門이라고도 한다. 1914년 총독부의 도시계획에 따라 도로나 경의선 철도 개설 명분으로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된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현장에는 조그만 표지석에 짤막한 사연만 담아놓았다.
일상에서 반복하는 길이라도 운전할 때는 보이지 않은 곳이 걸음으로써 보인다. 운전할 때 겨를을 둘 수 없는 여유가 걸음으로써 생기는 이유는 걸으면 시선 둘 데가 많아 걸음의 미학을 누릴 수 있으며, 걸을 때는 비바람 치는 상념도 잔잔한 호수가 되기 때문이다. 한양도성을 따라가는 걷기는 역사탐방뿐만 아니라 걷는 재미가 따르는 까닭에 의미가 더 두드러져 날로 동참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다양한 동우회가 생겼다고 하겠다.

서소문역사공원 앞 교차로에서 횡단한 다음 평안교회를 바라보며 골목으로 들어가면 ‘수렛골’ 터가 나온다. 과거 이곳에 숙박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들이 많이 모여든 데서 유래되었기에 ‘차동車洞’이라고도 불렀다. 이 지역 골목은 곧지 않고 이쪽저쪽으로 자꾸 구부러진 모양이라서 한양도성 첫 도전에서 헤맨 적이 있었는데, 차분하게 살피면 담벼락에 표시된 이정표를 이내 발견할 수 있다.
평안교회 갈림길에서 2시 방향의 좁은 길로 들어간다. 도심에서 한적한 감흥에 젖을 수 있는 아담한 공원이 기다리는데, 1884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에서 조선에 처음 파견한 아펜젤러를 기리는 ‘아펜젤러기념공원’이다. 그는 이곳 정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이어서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고 독립신문 등을 출판하는 등 당시 조선 청년들에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을 심어주었다.
이 일대에서 유일하게 한양도성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러시아대사관은 일반인의 출입이 어렵다. 1999년 러시아대사관 건물을 세우면서 발굴 조사 결과 한양도성 성벽과 기초가 확인되고 성벽 석축 일부가 노출되었다고 한다.

활엽수가 무성한 ‘배재어린이공원’이 한양도성을 따라가는 길목에 자리한다. 활엽수로 치장한 자그마한 공원에는 옛 정취가 꽉 차게 흐르는 가운데 쉬어가도록 그늘을 마련해 놓았다. 하얀 시계탑 뒤로 어설픈 소나무 한그루를 가림막 삼아 발그스레한 벽돌 건물이 보일 듯 말 듯 한 모습을 띤다. 가까이 다가서니 다름 아닌 고풍스러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다.
정동길로 들어서자마자 1898년에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 교회당인 정동제일교회가 고혹적인 색채를 띠며 정동의 역사를 써 가고 있다. 정동제일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인근의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개화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배재학당에서 강의하면서 정동교회 청년회를 중심으로 독립협회의 전위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정동교회와 연접하여 한양도성이 지나간 구간에 세워진 이화여자고등학교가 두루뭉술한 호박돌이 박힌 꽃 담장을 정동길에 선보인다. 교정에서 가장 오래된 심슨기념관은 붉은 벽돌로 마감한 서양식 근대 건물이다. 이곳에는 1887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으로 여성 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했던 보구여관普救女館址이 있다가 1912년 흥인지문 옆의 볼드윈 진료소와 합쳐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 전신인 해리스 기념병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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