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의 시절 오랜 시간의 자취가 그윽한 백두대간 조령산 자락의 문경새재는 들머리부터 알록달록한 단풍의 자태로 인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자지러지는 탄성이 쏟아진다. 햇빛에 반사된 단풍의 색채는 너무 강렬하여 마주 보기가 분에 넘칠 만큼 눈이 아리다.

석성과 함께 세워진 문경새재의 첫 번째 관문 주흘관 앞 광장에는 갖가지 지역 문화행사가 축제 분위기를 돋우며 널리 알려진 명소이다. 과거의 시간이 녹아있는 문경새재는 현재 시간의 사람들로 남녀노소 계층을 가르지 않고 늘 북새통을 이룬다.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가장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주흘관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걷기에 돌입한다. 지난날 조령산과 주흘산 등정을 위해 여러 차례 다녀간 길이지만, 산행이 아닌 트랙킹 모드로 여유롭게 걷다 보니 예전에는 미처 못 보았던 풍경들이 속내를 드러내며 속속 다가온다. 수령이 600여 년이나 되는 전나무 밑동의 그루터기는 과거 한양을 오가는 주요 통로에서 길손들의 안식처가 되어주고 다양한 애환을 간직했을 것이다. 나무는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뿌리 흔적이나마 보존하여 과거사의 한 페이지로 남기려는 관계 당국의 노력이 엿보인다.

주흘관 안쪽으로 지상파 방송국에서 고증을 거쳐 설치한 역사드라마 야외 촬영지가 고풍스러운 전통 울타리 안에 당시의 모습으로 드러낸다. 아직도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많은 역사 드라마가 이곳을 거쳐 가며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묵은 시간은 천 년도 더 훌쩍 흘러갔지만 현상은 유장한 과거를 붙들어 맨 채 과거를 고집하고 있다.

인파가 다소 한산해지고 길마저 고즈넉하다. 계절의 산물인 단풍이 낙엽이 되어 내뒹구는 흙길은 가을 색으로 곱게 치장하였다. 나뭇가지에 매단 단풍 틈으로 쉼 없이 쏟아지는 화려한 오색 빛을 맞으며 황홀경에 빠진다. 몸과 마음이 한데 어울려 뒹구는 동안 진행은 더디고 시간은 훌쩍 넘어 정오에 다가선다.

단풍이 산길 분위기를 주도하는가 싶더니 발걸음을 더할수록 물소리가 거세진다. 소리의 주역은 예전의 모습을 재현하는 물레방아 도는 내력이다. 통나무 속을 판 수로를 통해 공급되는 흐름의 원천은 몇 걸음 후에 나타나는 조국폭포이다. 가을바람을 타고 낭랑하게 들려오는 물소리가 잊힐 무렵 오른쪽에 주흘산 방향의 이정표가 나오고 가는 방향으로 문경새재의 두 번째 관문이 기다린다.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조령의 중간에 위치한 사적 제147호로 지정된 제2관문 조곡관이다.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기술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에 충주사람 수문장 출신 신충원이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이 시초가 되었는데, 숙종 때 신충원이 쌓은 옛 성 일부를 고쳐 쌓고, 중성으로 삼아 관문을 '조동문'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오르막 경사가 서서히 가파르기 시작할 무렵 주왕산과 태안 천리포수목원에서 익히 봤던 V자로 상처 난 소나무와 마주친다. 일제가 자원이 부족해지자 송진을 재취하여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소나무에 상처를 낸 것들인데,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아픈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관문의 부속 기능을 수행하며 영남과 충북의 경계를 그어주는 마지막 제3관문 조령관이다. 조령관 역시 임란의 영향을 받아 신충원의 노력이 보태어진 흔적을 담고 있다. 숙종 때 가서 조령산성鳥嶺山城을 쌓아 북적北賊을 방어하고 더불어 지금의 제3관문을 축조하였다 한다.

해발 650m의 조령관 정상에는 다양한 초록과 가을이 지쳐 퇴색된 단풍이 이제 겨울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머지않아 초겨울 절기를 앞두고 여행 준비를 마친 단풍은 초라해 보일 것 같은데 오히려 한 계절을 화려하게 풍미했던 이력을 자랑하듯 당당하다.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100선 중에서 으뜸의 자리에 선정될 만큼 걷기에 최고를 자랑하는 문경세재다. 김훈의 '문경새재는 몇 굽이냐'에서는 한국인의 정서에서 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삶의 전환과 확장을 의미한다는데, 그 옛날 장원급제 금의환향하는 부푼 꿈을 안고 이곳을 넘었던 선비들은 시험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을 상상하며 짓눌리는 마음의 부담을 쓸어 담았을 무거운 길이었으리라.

오늘날 문경새재는 '오미자'라는 지역 대표 브랜드로 성공의 신화를 써오며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는 데에 편승하여 전국에서 가장 걷기 편한 길 중의 한 곳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한결같이 가 본 다음에 비로소 직성이 풀린다는 최고의 트랙킹 코스이며, 나아가 가을 단풍 나들이의 명소임과 동시에 걷는 것만으로 심신이 캐어 되는 길로 거듭났기에, 일탈의 영역에서 붉은 단풍과 노란 은행잎이 사이좋게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가을 하나를 주었고 호사한 추억 한 편을 만들 수 있어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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