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명당 터에서 인재를 키우겠다

 

촬영 - 박미애 사진가
촬영 - 박미애 사진가

 

8살 당찬 소년 심의두는 초등학교 입학 전 조부모님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던 날 화산의 명당 터를 찾아 전국 각지에서 묘 자리를 찾아 지관을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는 대략 40여 명의 사람이 점심을 먹을 곳도, 파는 곳도 없었고, 이에 사람들은 큰아버지 댁으로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당시에 그 많은 사람의 밥을 준비할 수 있는 집은 거의 없었고, 오는 손님들을 굶겨 보낼 수 없어 호박을 따다 풀떼죽을 만들어 점심을 대접하곤 했다.

소년 심의두는 이렇게 오는 사람들로 인해 심부름도 도맡아 해야 하고, 더더욱 화가 나는 것은 이날은 천자문 공부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팔십 노인들이 점심을 드신 후 “한국에서 최고의 명당 터가 청계천, 계룡천, 화평천인데, 화평천은 문관 5천, 무관 5천이 나오는 신비스러운 명당 터다. 이 터에 자리를 잡으면 만대에 걸쳐 득세한다”라는 말씀을 나누고 계셨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어린 소년 심의두는 당차게 어른들께 말씀을 드렸다.

“이런 좋은 명당 터에 한 가문이 들어서서 독점하면 언제 문관 5천, 무관 5천을 배출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에 학교를 세워 수백 명을 가르치면 더 많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을 겁니다.”

당찬 꼬마의 이야기에 노인들은 화를 내기보다는 이구동성으로 꼬마의 말을 인정하고, 그 후로는 명당 터를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촬영 - 박미애 사진가
촬영 - 박미애 사진가

 

 

어깨너머로 배운 장기

8살 어린 꼬마는 마을 사람들이 장기를 둘 때 어깨너머로 장기판을 열심히 들여다보곤 했다. 묘하게 끌리는 장기판 때문에 꼬마 심의두는 장기에 입문하게 되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마을 장기 두는 이들을 상대로 거의 백전백승을 할 정도였다. 손으로 그림을 그려 장기 책자를 만들기도 할 정도였다. 정밀하게 그려진 장기 책자는 8살 꼬마가 그렸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정교하다.

“장기는 인생의 축소판이라 생각”한다는 심 이사장은 집중의 원리와 조직의 원리, 속전속결의 원리, 다수결의 원리, 협동의 원리,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의 원리, 기물이 적어도 필승의 병법과 외통수에 몰려 패하는 등 장기 속에서 터득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가 있다 한다. 장기를 두면서 코앞만 보고 두면 실패하고 먼 안목을 내다보며 두면 이긴다고 한다. 장기는 후에 그의 인생에서 그를 지켜준 수호신 같은 존재가 된다.

 

학교까지 걸어서 100리 길을...

아들 셋, 딸 둘 5남매 중 둘째인 심의두 이사장은 어머님이 9살 때 돌아가셨다. 어린 나이에 맞이한 어머님의 죽음은 크나큰 충격이었고, 세상을 다 잃은 듯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재혼해 동생들이 7명이나 더 생겨 12남매의 둘째가 되었다.

형제가 많아 모든 형제가 학교를 못 다녔지만, 아버지와 큰형이 고생해 소년 심의두는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완주중학교까지는 오십 리, 하루 왕복 백 리 길을 걸어 다니다 보면 운동화가 일주일이면 해지게 된다. 하지만 운동화를 사달라는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학교를 그만두라는 얘기 때문에 운동화가 다 해져도 그냥 신고 다녔다. 발뒤꿈치가 다 해져 피가 날 정도였다.

이때 중학생 심의두는 학교를 세워도 내가 고향에 세워야겠다. 나의 이런 힘든 전철을 후세대는 밟지 않게 하겠다고 생각을 했다 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몇 개월 뒤 6·25전쟁이 일어났다. 이곳에서는 지게질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게 쌀 한 가마값만 달라고 해 서울로 상경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일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갖은 일을 해가며 용문고등학교 야간을 다니면서 고교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학생이 되어 본 심의두 이사장 (촬영 - 박미애 사진가)
학생이 되어 본 심의두 이사장 (촬영 - 박미애 사진가)

 

신익희 선생님을 만나...

용문고등학교 야간을 다니면서도 신익희 선생님의 강의라면 모든 것 제쳐두고 들으러 다녔다는 심 이사장은 ‘스웨덴의 총리는 신문에 언급이 되지 않는다. 암행어사처럼 일반 교통을 이용해 민생을 살피러 다닌다. 모든 일은 국민의 세금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총리의 치적이 아니라고 스웨덴 총리는 말한다. 나도 대통령이 되면 스웨덴 총리처럼 신문에 나의 이름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라고 강의하시던 신익희 선생님을 만난 것이 인생에 있어 크나큰 의미라 회고한다.

강의 시간에‘조직의 원리를 아십니까?’에 대한 질문이 인연이 되어, 신익희 선생님의 오른팔이 되어달라는 부탁까지 받았던 심 이사장.

당시 김재순 선대본부장을 그때 만났다고 한다.

조직의 원리에 대해 솔직히 모른다고 답할 정도로 솔직했던 신익희 선생님께 고등학생 심의두는 장기의 원리에 관해 설명한다.

“장기에서 청 16개, 홍 16개가 있지만 나라는 주체가 없으면 장기를 둘 수 없다. 나라는 주체를 넣으면 33이 된다”

오른팔이 되어달라는 신익희 선생님의 제안에 청년 심의두는 당돌한 질문을 했다고 한다.

“대권을 잡은 뒤에는 저에게 무엇을 해주실 건가요?”

청와대 비서실장을 시켜주겠다고 약속받은 청년 심의두는 각 요직의 인재를 찾아야 한다고 요청, 3개월 만에 조직을 완성했다고 한다. 한강 백사장 연설에 전국에서 백만 명이 넘게 오기도 했다고. 하지만 전주에 내려가는 유세를 말렸는데, 기차로 이동하다 운명하신 신익희 선생님과의 연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한다.

신익희 선생님이 대통령으로 출마 당시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피켓을 들고 선거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수배령이 내려졌고, 청년 심의두는 근무 중 곤색 양복을 입은 두 명이 와 일 분만 얘기하자 하더니 바로 중부경찰서로 끌려갔다. 이어 특수부대로 인계되고 그때부터 데모한 사진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구타와 고문이 시작되었다. 가족들과는 연락조차 불가능한 상황에서 같이 근무하던 친구가 수소문 끝에 구치소에 찾아온 덕분에 새벽 2시, 아버지께 연락이 닿았다. 그 당시 아버지의 처가면서 서당 동기인 이존화 국회의원의 도움으로 일주일 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석방된 뒤 바로 군대에 입대하였다.

 

지나온 시절을 회상해보는 심의두 이사장 (촬영 - 박미애 사진가)
지나온 시절을 회상해보는 심의두 이사장 (촬영 - 박미애 사진가)

 

군대에서도 수호신이 되어준 장기

입대한 군에서도 장기가 나의 인생에 수호신이 되어주었다. 장기를 잘 두는 덕분에 육군 부관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는 훈련소 수용연대 심사대로 배치받아 당시 훈련소 한신 소장과 수용연대 이계순 대령 등과 만나 장기는 작전을 배우는 것이라며 장기를 두기도 했다.

전북대 분교가 부대 인근으로 옮겨져 군 복무 중에 학교를 다닐 수 있게도 되었다. 당시 하사관 이하의 군인이 입시에 합격하면 수업료 면제, 3년간 무료로 대학을 다닐 수 있는 혜택이 있어, 13명이 지원, 3명이 합격하였다. 제대 후 1년간 장학생으로 전북대에서 교사자격증도 받았다.

1963년 화산면사무소 회의실을 빌려 중학교에 가지 못한 청소년 7명을 대상으로 성인교육을 시작했다. 이것이 화산중학교의 기원이다. 회의실을 사용하지 못할 때는 면사무소 옆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그때의 상황을 다 지켜보았던 그 나무는 현재도 그 자리에서 심 이사장과 그 당시를 회상하며 조우한다.

7명의 학생을 가르치면서 중학교 설립 준비를 하는 청년 심의두는 마을 분들로부터 ‘미친놈’이라는 소리도 들어야 했다. 국가에서도 돈이 없어 못 짓는 학교를 돈도 없는 가난한 청년이 세우겠다고 하니, 어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결국은 아버지도 아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쌀 한 가마니와 땅 590평을 주며 쫓아내듯 하셨다.

그때부터 청년 심의두는 삽과 괭이를 들고 부인과 함께 종산 약 1천 평을 개간, 그곳에 고추를 심어 돈을 벌었다.

함께 한 아내의 고생도 말이 아니었다. 귀한 집 딸 데려다 말 그대로 호강은커녕 일꾼으로 부려먹은 꼴이 되었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아내에 대한 고마움은 항상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심 이사장은 아이들에게도 미안하다는 마음을 전한다.

 

촬영 - 박미애 사진가
촬영 - 박미애 사진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교장 선생님의 꿈을...

어린 심의두의 어릴 적 꿈은 선생님이었다. 그 당시 선생님들은 잘못도 없는 어린아이들을 화풀이 대상처럼 조금만 잘못을 해도 매를 들어 아이들을 때리곤 했다. 어린 심의두는 ‘선생님이야말로 절대 권력을 가진 세상에서 제일 높은 분이구나’라는 생각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무실 청소를 하게 되어 교장실에 가게 된 어린 심의두의 눈에 띈 교장 선생님의 회전의자! 청소하다 교장 선생님의 회전의자에 앉아 돌다가 주번 선생님께 딱 걸리게 되었다.

선생님은 “꼬마 교장 선생님, 언제 부임했습니까?”하길래 “오늘 부임했습니다”라 하자 갑자기 화를 내시면서 우리들을 교무실 가운데로 끌고 가 주먹으로 때리고 발길질을 했다. 너무 아프고 서러워 눈물이 났지만, 평소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 때문에 울 수도 없었다.

“남자가 지켜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신의’다. 팔다리가 부러지더라도 울지 않는 게 ‘신의’이고, 두 번째는 자신이 가진 생각을 남에게 정확히 전달해야 하는 것이 사나이다”

아버지의 신의 교육 때문에 울지도 못하고 계속 맞은 것이 아직도 생생한 기억 속에 남아있다는 심 이사장은 ‘나는 앉아보았지만, 선생님은 앉아보지 못했으니 내가 선생님보다 더 낫다. 내가 반드시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선생님에게 이런 일로 아이들을 때리지 말라고 훈계하고 말 거다’라는 생각을 하며, 이때부터 어린 심의두의 꿈은 교장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돌리기만 해봤지만, 나는 13세 번이나 타보고 맞아 덜 억울하다고 생각했다는 꼬마 심의두는 “어떻게 하면 교장 선생님이 빨리 되냐”고 5.6학년 선배들께 물어봤지만, 12살뿐이 안 된 놈이 벌써 교장 될 타령이냐며 맞기만 했다고.

 

인재를 배출한 나무와 조우한 심의두 이사장 (촬영 - 박미애 사진가)
인재를 배출한 나무와 조우한 심의두 이사장 (촬영 - 박미애 사진가)

 

면 사무실 옆 나무 밑에서 시작한 교육이 위대한 인물 배출

7명, 면 사무실 옆, 큰 나무 밑에서 시작한 교육이 우리나라 컴퓨터 1호 박사, 국중각 교수를 배출하기도 했다. 국 교수가 동상이 걸려 다리를 절뚝거리며 대학에 합격했는데 입학금이 없다고 찾아왔을 때도 후원자를 연결해 지원해주기도 했다. 이 외에도 한빛 게임으로 거부가 된 김영만 대표, 박승권 변호사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들이 성공해서 모교에 장학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화산중학교의 프로그램은 한국의 미래 지도자를 육성하고 위기에 직면한 농촌학교도 살릴 수 있는 해결책이다. 앞으로 세계를 좌지우지할 훌륭한 지도자 양성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는 심 이사장은 지도자의 덕목으로 이황이 말한‘계승, 개혁, 창조’를 꼽고 있다.

화산중학교의 교훈은 ‘신의, 성실, 노력’이다.

 

촬영 - 박미애 사진가
촬영 - 박미애 사진가

 

세 분의 어머니를 모심

9살 때 어머니를 멀리 보낸 심 이사장은 세 분의 어머님이 계시다.

심 이사장을 낳아주신 어머니, 키워주신 어머니,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주신 마을의 어머니.

“학교에서 일본말을 가르치니 보내고 싶지 않지만, 친구들을 사귀어야 하니 보낸다‘는 낳아주신 어머니는 편찮으신 가운데도 ”일본인들이 척식 주식회사를 통해 논밭을 뺏어가는데 이 원수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걱정이다“라는 말씀을 하시곤 하셨다. 어린 심의두는 걱정하시는 어머니께 ”제가 갚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안심 시켜 드렸다 한다.

어머니는“첫닭이 울면 무조건 일어나 빗자루를 들고 쓸어라. 정직이 무기다. 새벽에 일어나 10바퀴 돌고 청소를 해라’라는 것을 어린 심의두에게 항상 말씀하셨다. 현재도 어머님의 말씀대로 심 이사장은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사슴, 오소리 키워 자금 마련

사슴 50마리, 오소리 50마리를 키우고 결혼반지와 재봉틀까지 팔아 자금을 마련하여 1969년 12월 드디어 화산중학교가 탄생하였다.

고생을 해봐야 성공할 수 있다는 심의두 이사장은 일을 하도 많이 해서 손에 지문이 안 나올 정도라고.

어려울 때 심 이사장에게 가장 힘이 되어준 원동력은 “어렸을 때 어머니의 교육과 무언가 해야겠다는 사명감, 할 수 있다는 신념,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현재의 그를 만든 것이라고 한다.

 

 

스리랑카 교육부 장관과 만남

1969년, 미국 오하이오주 우드모어 중학교와 뉴욕 리버풀 고등학교와 자매결연 후 ‘한글과 로마자 중 어느 글이 우수한가?’라는 주제로 교장단, 학자들과 토론회에서 한글의 우수성을 역설했다. 그 후 한글 세계화가 한국을 1등 국가로 만들어 가는 길임을 확신, 1971년부터 현재까지 세계 각국의 학교와 자매결연 및 교류 학습을 통해 한글 세계화를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또한 심 이사장은 인종 갈등으로 26년간 내전을 겪었던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 한글교실을 세웠다. 콜롬보의 한 중학교 교실에 책걸상, 영상 교육 장비를 들이고 강사 2명도 파견했다. 심 이사장은 스리랑카를 방문해 스리랑카 교육부 장관과 외무부 장관을 만나서 한국어 교육을 확대하기로 합의했고, 스리랑카 현지 학교에 현대식 칠판 등 1억 원 상당의 학습기자재도 지원했다. 그 후 스리랑카의 반둘라 교육부 장관이 직접 자율화산중학교를 찾기도 했다. 약속을 지켜준 스리랑카 교육부 장관의 방문에 심 이사장은 다시 생각해도 감명 깊은 기억이라고 회상한다.

 

촬영 - 박미애 사진가
촬영 - 박미애 사진가

 

한글의 세계화는 대한민국을 최강국으로 만드는 지름길

스리랑카 교육부 장관 일행이 한국 방문 시 “한국은 미국의 속국이 아닌데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이 영어로 표기되어있다‘는 이야기에 식은땀이 나올 정도로 창피했던 기억이 있다. 또한 만주에서 한국을 방문하신 분들도 “남한은 혼이 빠진 나라고, 북한은 독재의 나라다. 우리는 200년간 살면서 한글을 지키기 위해 갖은 핍박도 견뎌냈는데 남한은 어찌 영어 간판이 도배되어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던 심 이사장은 이제는 혼이 담긴 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2014년부터 한글 세계화 총본부를 화산자율중학교 내에 설립하여 총재로 추대된 후, 우리나라 광역 시•도 및 군에 한글 세계화 본부를 설치하여 회장단을 선임하고 전국 본부를 운영하는 한글세계화 운동본부 심 총재는 한글이 가는 곳에 경제가 함께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한글이 반드시 세계어가 될 것이다.”라며 100만 명 모집을 목표로 한 달에 만 원씩의 후원금을 모집하고 있는 심 이사장은 전국 회원 확보에 총력을 기울인다면 한글세계화는 가속화 되리라 확신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세종시에 바닥면적 3천 300평에 33층의 건물을 건립, 이곳에 한글세계화총본부를 만들고 전 세계의 사람이 한글을 쓰고, 쇼핑, 관광, 숙박 등을 하며, 한국의 문화, 한국의 음식, 한국의 전통 옷 체험 등을 하길 원한다. 더 나아가 한글대학교, 한지대학교 등 특수대학교도 만들 계획이다.

한국에 태어났다는 자부심을 우리 자녀 세대들이 갖게 해주어야 한다는 심의두 이사장은 혼이 없는 삶을 사는 지도자는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고 강조한다.

 

이 세상은 도전자의 몫이다. 도전하라!

도전하는 자만이 성공한다.

 

팔순이 훨씬 넘은 연세에도 끊임없이 도전하는 심의두 이사장.

“다시 태어나도 지금 하는 이 일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는 삶이 나의 인생이다.”

아직도 목표를 위해 불철주야하는 그를 보며, 한글이 곧 세계화가 될 날을 고대해본다.

 

촬영 - 박미애 사진가
촬영 - 박미애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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