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흑백 세상은 맑고 순수한 얼굴로 결빙의 자연 앞에 겸손하다

 

만경창파 동해의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바다를 발아래 굽어보며 선자령을 넘어 대관령 옛길을 걷는다. 선자령(仙子嶺) 신선이 아들을 데리고 내려와 놀다 갔다는 고갯길과 마주한다. 선자령 겨울 산들이 바람 앞에 일제히 일어선다.

한 차례 날리던 눈발 사이로 맑고 푸른 하늘이 번뜩이고 겨울 계곡의 빙상을 감돌다 부서져 올라오는 햇살이 잘 빨아 놓은 셔츠처럼 맑고 투명하다.

겨울나무는 설원의 옷을 갈아입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투명한 빛을 뿜어내며 침묵으로 서 있다. 숲으로 다가서자 겨울나무는 눈의 결정에서 뽑아 올린 섬섬옥수 백설의 비단 실로 옷을 지어 입고 섬세한 결정체로 면사포를 만들어 쓴 신부의 아름다운 신성 같은 신비로움에 쌓여 있다.

거룩하고 성스러운 신의 숨결 품은 설악산 오대산의 영봉들이 설 백의 준령을 거느리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파도처럼 첩첩이 쌓이고 겹쳐 밀려오고 밀려가며 회초리처럼 불어오는 세찬 겨울바람을 타고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매서운 칼바람을 동반한 거친 숨결을 쏟아 내며 드넓은 선자령을 휩쓸고 지나간다.

이미지 제공 - 박미애 사진작가
이미지 제공 - 박미애 사진작가

눈바람은 백두대간의 높은 준령을 쓰다듬고 보듬어 대지에 설국을 만들어 가며 기세를 떨치고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등산길 옆 잡목 위에 온통 설화를 꽃피우느라 여념이 없다.

구름도 쉬어 가고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도 감히 오르기를 거부하는 태산준령의 봉우리가 아득하게 보이고 구름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한 수묵의 자태는 선자령 이라 선계의 신선들 이야기 속에나 나올 법한 숨 막히게 아름다운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거대하고 장엄한 산맥을 바라보다 바람에 눈을 털어내는 활엽수의 속살에서 여리고 가련한 꽃잎이 숨어 새파란 새 생명의 아름다움을 본다.

눈의 입자는 금강송의 거대한 몸집이나 싸리나무의 가녀린 가지 끝에도 말라버린 꽃송이 위에도 새 생명을 불어넣어 영롱한 꽃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눈의 결정체는 어김없이 섬세한 세공을 하는 장인의 솜씨로 아름다운 겨울의 문양을 온 산에 장식하고 있다.

눈앞에 펼쳐진 흑백 사진 같은 세상이 결코 단조롭거나 건조하지 않다.

흰색 바탕 위에 촘촘하게 서 있는 겨울나무는 가을의 그 많은 이파리를 떨어트리고 성글하게 말라버린 검은 뼈마디를 산의 허리 하얀 속살에 자리를 잡아 빼곡하게 산 능선을 타고 올라 정상에 이르고 산의 능선들은 이발사의 숙련된 솜씨로 가르마를 타듯 잘 다듬어진 머릿결 같다.

흑백의 능선은 오히려 현란한 가을의 색감보다 빛의 스펙트럼으로 무지개를 동반한 은회색의 화려한 광채가 난다.

천박하지 않으며 고급스럽고 화려함을 뽐내지 않으며 시원의 아름다움으로 태고의 순수함을 간직한 채 고고한 자태로 우아하다.

겨울의 흑백 세상은 맑고 순수한 얼굴로 결빙의 자연 앞에 겸손하다.

바람의 언덕을 오르는 능선에 자리 잡은 풍력발전기는 산하를 굽어보며 바람의 언덕에 키다리 아저씨처럼 우뚝 서서 코발트색 하늘을 머리에 이고 불어오는 바람을 애무하듯 느릿하게 돌아간다.

선자령 허리춤 아래에서 또다시 눈의 입자를 가득 실은 구름이 앞을 다투어 몰려온다. 춤추는 무희의 모습으로 나풀거리는 나비의 날개처럼 부드러운 속살 같은 흰 눈이 소담하게 겨울 산의 능선을 덮는다.

눈 덮인 오솔길 따라 한 발 한 발 걷는 발밑으로 태고의 족적이 소리 없이 남겨진다. 뒤돌아보면 이내 눈에 덮여 살아질 미미한 발자국이지만 짧은 생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깊은 산속 무명의 삶의 흔적이나마 성스러운 신령함으로 나의 자취에 정성을 다한다.

겨울 산을 점령한 눈꽃 송이가 어깨 위로 나비처럼 살포시 내려와 가슴 속으로 들어왔고 겨울의 적막한 산속에서 귀를 간질이며 소곤소곤 속삭인다. 겨울 산속이 절대 춥지만은 않다고 겨울 산속이 외롭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깊고 푸른 겨울 숲의 고독이나 적막감이 진한 감동과 함께 영혼의 울림들이 영봉에서 들려오고 하늘에서는 보드라운 솜털 같은 눈들이 소복소복 내린다.

겨울의 나무들이 일제히 평화롭고 깊은 겨울잠 속으로 빠져들며 숲은 고요하고 백두대간 선자령 표지석이 바람을 감싸 안으며 숲속 겨울은 포근하게 깊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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