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권용진이 이 시대 청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행복”, 그리고 “성공”에 대하여

 

청년들이 참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 혼란스런 세계 정세와 국내의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인해 청년들이 위축되는 것이 느껴지는 요즘, ‘성공’이라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청년들 사이에서 점점 뿌리내려지고 있다.

‘성공’이란 무엇일까?

그저 ‘운이 좋아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배경이 있어서’ 등 ‘노력’을 통해 청년들 스스로 얻어내는 결과가 아닌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고 그들이 게을렀다고 절대 말할 수 없다. 청년들은 누구 하나 말할 것도 없이 ‘모두’ 노력했다. 단지 결과가 따라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청년들은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는 이유로 절망했고, 늘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권용진 작곡가는 어땠을까?

 

 

권용진 작곡가는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학사 및 석사과정 졸업 후 독일 쾰른 국립음악대학원 디플롬 및 작곡 최종 학위 졸업을 하였으며,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작곡학과장 및 대학원 주임 교수를 역임한 실력파 음악 거장이다.

또한, KBS 교향악단과 서울시립교향악단 등에서 다수의 음악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예술의 전당에서 '레미제라블 주역 Alfie Boe 내한 공연 음악총 감독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성공’에 대한 의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성공이라는 ‘결과’만 볼 뿐, 그 누구도 그 ‘과정’을 보지 않기 때문에 소외감과 자책에 빠진다. 사실 ‘인생’ 전체를 보면 아름다운 장성곡과 같은데, 청년들이 좀 더 ‘성공’이라는 단편적인 부분만 보지 말고 시야를 넓혀 자신이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을 찾아내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라 생각한다.”

 

 

음악과의 만남

권용진 작곡가의 유년기는 한국전쟁 직후로 사회 전체가 혼란했다. 당시 그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피아노를 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권 작곡가는 당시를 회상하며 “왜인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피아노를 치는 것을 좋아했다. 우연히 음악 수업 시간에 피아노를 접해 본 것이 계기였는데, 집이 8남매에 형편이 그리 좋지 못해 수업 시간 외에 학교 음악실에 몰래 들어가 피아노를 쳤던 기억이 있다. 심지어 새벽에도 몰래 학교 음악실로 들어가서 피아노를 치면서 놀다가 순찰 돌던 교장 선생님께 걸려 여러번 혼이 났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음악 선생님의 추천으로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점차 음악 작곡가로서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유년기를 회상하던 권 작곡가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당시에는 모두가 가난하고 힘들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제대로 할 수 있지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작곡을 배우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만약 음악이 즐겁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열정’ 하나로

권용진 작곡가는 대학 진학을 두고 아버지와 다투었던 기억에 대해 말했다.

당시 아버지는 어린 권 작곡가가 상과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라셨지만, 그에게 있어서 음악에 대한 열망은 포기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때 아버지하고 많이 다퉜다. 집안 형편 때문에 음악 공부하는 것을 지원하기 어려웠던 것도 이해했지만, 그래도 음악 공부하는 것을 포기하기 싫었다. 어떻게 해서든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고 말하며, “그래도 장남이었던 큰 형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전부터 음악에 대한 열망이 자신 못지 않았는데, 음악 공부를 하겠다고 말한 이후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주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결국 음대 진학에 합격했고, 자신의 다짐을 지키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고, 20살의 나이에 담당 교수의 권유로 동아 콩쿨에 나가 입상 했고, 더 나아가 자신이 작곡한 곡이 KBS 교향악단을 통해 연주되는 쾌거를 이뤘다고 한다.

권 작곡가는 이 당시에 대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입상도 모자라서 KBS 교향악단이 내 곡을 연주하는 것 만큼 뿌듯한 일은 없었다. 연주회 날에 부모님이 오셔서 자신의 곡을 듣고 감동하신 모습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그러다가 권 작곡가는 잠깐 생각에 잠기다가 이윽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쉬웠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대학교 등록금도 전부 장학금으로 내야 다닐 수 있었을 만큼 금전적으로 여유도 없었고, 독일 유학 시절에도 언어적인 문제로 고생을 겪기도 했기에 매사가 도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나름 굉장히 재미있던 순간들로 기억된다”고.

 

 

이어지는 '열정'

권용진 작곡가는 자신의 음악 계보가 자녀에게 이어지는 것을 굉장히 기뻐했다.

"독일 유학 시절을 가족과 함께하게 보내게되었다. 초창기에는 혼자 독일에서 적응하는 기간을 두다가, 나중에는 가족들이 독일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 것"이라 말했다. 

이어 그는 "그런데 딸이 음악적 재능을 이어받은 것 같았다. 3살부터 자기와 마찬가지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더니 5살에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고, 독일에서 음악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지휘자로 활발히 활동 중"이라고 말하며 입가에 흐믓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놀랍게도 권용진 작곡가의 딸은 대한민국 대표 여성 지휘자 권현수였다. 권현수 지휘자는 아버지인 권용진 작곡가가 독일 유학 중에 가족과 함께 독일로 건너가 생활하면서 음악과 함께 성장해 독일 쾰른 훔볼트 뮤직 김나지움 음악 학교를 졸업, 뒤셀도르프 국립음악대학에서 디플롬과 콘체르트 엑사멘을 취득하였다.

더 나아가 권 지휘자는 각종 유명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고, 국내에서는 최근에 소리얼필하모닉오케스트라 공연을 지휘한 바 있다. 흔히 '피는 못 속인다'라는 말이 있듯, 재능은 되물림 되는 듯하다.

더 놀라운 것은 권용진 작곡가의 열정이 딸인 권현수 지휘자에게 이어진 듯하다.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자녀에게 이어지는 것이 아름답게 보여진다.

아버지인 권용진 작곡가는 딸의 활약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딸에 대한 애정어린 자랑을 하는 그의 모습은 '아버지'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인생, 즐거운 과정

권용진 작곡가는 인생을 ‘즐거운 과정’이라 표현한다.

“매사가 새롭고 유익하며, 절대 보잘 것 없지 않은 특별한 순간들을 매번 마주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청년들이 말하는 ‘성공’은 무언가 고정불변의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길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말하지 않은가.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찾아오지만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 그리고 그 기회를 어떻게 잡을지는 저마다 다르고 방법 역시 제각각”이라면서, “자신도 그랬고, 미래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없었음에도 현재 자리까지 올 수 있던 이유는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남들과 같이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 말했다.

 

 

‘행복’을 공유하다

권용진 작곡가는 자신의 ‘성공’을 ‘행복’이라 말하며, “‘행복’은 결코 혼자 이룰 수 없다”고 한다. 음악은 절대 청중없이는 존재할 수 없듯이, ‘행복’도 음악과 마찬가지로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권 작곡가는 “물론 ‘행복’도 저마다 다르겠지만, 자신의 ‘행복’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음악을 한다는 것”이라며, “남은 시간 동안 더 많은 음악을 작곡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봉사에 참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청년들에게

권용진 작곡가는 미래를 준비하는 청년들에 당부했다.

“지금까지의 시간,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들은 모두 과정이다. 물론 어려운 순간들을 마주 할 수 있다.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겠지만,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다”며, “이 모든 것은 그저 ‘과정’이기에 잘 되지 않는다고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한, “나 또한 실망스런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적이 많았고, 그에 좌절도 많이 했었지만, 나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남은 시간동안 최대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란다”고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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