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란성 쌍둥이는 유전자가 똑같다면서 왜 자라면서 달라질까?
할아버지 어릴 적 저녁 식사가 손주들 건강을 결정한다는 게 정말일까?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짓지 않는다면 좀 모자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도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답은 후생유전학에 있다.

 

쌍둥이 연구

쌍둥이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이 없던 옛날에는 쌍둥이에 대해 신기함, 경외감 때로는 공포감까지 가졌다. 쌍둥이에 대해 많이 알게 되면서 이러한 감정은 많이 없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쌍둥이, 특히 일란성 쌍둥이를 예사롭지 않게 보는 시각은 많이 남아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란성 쌍둥이 딸 아버지인데, 돌이켜 보면 쌍둥이를 임신하였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내가 쌍둥이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현실이 상당히 당혹스럽고 난감했다. 흔치 않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겪는 감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힘들게 공부하던 시절이라 임신 중, 그리고 갓 태어났을 때 산모, 아이들 모두 제대로 돌보지 못한 아쉬움도 많다.

이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일란성인지 이란성인지 알기 쉽지 않았다. 커가며 생김새, 성격, 기호 등이 많이 달라 이란성 쌍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면 많은 사람이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던 모습이 생생하다. 자라면서 처음에 가졌던 복잡했던 감정은 사라져 가고, 나 자신도 쌍둥이에 대해 점점 더 친숙해졌다. 길거리에서 다른 쌍둥이를 보면 더 애틋한 마음이 들곤 하였다.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부모 품에서 멀리 떨어져 저희끼리 살게 되었는데, 당연히 나도 많은 걱정을 했다. 그런데 서로 의지할 수 있어 그런지 내 걱정과는 달리 씩씩하게 난관을 극복하고 이제는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 자기들 할 일 잘하며 살고 있다. 지금은 이 아이들이 쌍둥이로 태어난 것을 아주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저희도 부모와 멀리 떨어져 살 운명을 예감하고 살아남기 위해 쌍둥이로 태어났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안도감은 물론 감사한 마음마저 가지게 되었다. 다른 쌍둥이 부모들도 나와 비슷한 감정의 굴곡을 겪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약간의 당혹감, 그러나 시간이 차차 지나며 오히려 안도감과 감사함!

일란성 쌍둥이를 가진 부모들은 이란성 쌍둥이 부모보다 숨겨진 이야기가 훨씬 많을 것이다. 이란성 쌍둥이야 유전적으로 일반 형제들과 다를 바 없지만, 일란성 쌍둥이 경우에는 유전적으로 거의 100% 같다. 따라서 어릴 때 모습은 부모라 해도 참으로 구별이 어려운 것이다. 체취까지 같다고 하니 더욱 어려울 것이다. 부모도 이런 실정이니 남들이야 오죽하겠나 싶다. 이런 면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기도 하다.

 

쌍둥이 연구를 학문적으로 처음 시작한 사람은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의 사촌 골턴(Sir Francis Galton)

쌍둥이 연구를 학문적으로 처음 시작한 사람은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의 사촌 골턴(Sir Francis Galton)이다. 대단한 천재로 알려져 있고, “다윈의 불독이라고 불릴 정도로 진화론 전파에 평생을 보낸 사람이다. 골턴은 1875년에 “쌍둥이의 역사라는 논문을 출판하여 유전과 육아의 영향 중 어떤 것이 더 강력한지를 밝히고자 하였는데, 그의 결론은 유전이다.

결과적으로 1883년 우생학이라는 학문을 창시하고 사람들을 유전적으로 우성과 열성으로 나누었으며, 사회 발전을 위해 열성인자를 가진 사람들을 제거하자는 주장마저 하였다.

골턴은 유전 대 양육 (nature versus nurture)”이라는 매우 간략하지만 울림이 큰 멋진 말도 만들었다. 이 말은 어찌 보면 선동적이기도 하다. 1869년에는 유전적 천재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골턴은 다양한 부분에서 많은 업적을 쌓아 인류 문명 발전에 크게 공헌했지만, 우생학으로 인해 많은 비판도 받는다. 골턴의 뒤를 이은 우생학자들은 실제로 사람들을 유전적으로 재단하여 열성이라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격리하고, 거세 등 불임 조치까지 하였다. 이런 일이 미국을 비롯한 유럽 사회에서 20세기 초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하게 된 근거도 우생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골턴의 학문적 주장이 이렇게 몰지각한 일로 구현되는 것을 보면 영향력 있는 학자들은 참으로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자기 학설을 주장할 일이다.

미네소타 대학의 쌍둥이 연구팀 부샤르 주니어(Thomas J. Bouchard, Jr.)와 시걸(Nancy L. Segal) 등은 1990년 쌍둥이에 관한 획기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들은 유전적 요인이 인간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기 위해 어릴 때 입양 등으로 인해 멀리 떨어져 자란 일란성 쌍둥이들을 주로 연구했는데, 그중에서도 루이스(James Lewis)와 스프링거(James Springer)에 관한 사례는 너무나 신기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루이스와 스프링거는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생후 4주 때 다른 가정에 입양되어 39세에 다시 만났는데, 헤어져 알지도 못한 채 살아온 이들 삶의 궤적이 너무나 유사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둘 다 린다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과 결혼했고, 베티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과 재혼했다. 둘 다 경찰 교육을 받았고, 법집행기관에서 파트타임 직업으로 일했다.

첫째 아이는 제임스 알랜 루이스, 제임스 알랜 스프링이다. 다만 이러한 연구는 더 진행되지 않아 이들의 연구결과를 반복적으로 관찰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든 부샤드 주니어와 시걸의 연구는 유전적 요인이 인간 삶을 결정짓는 데 매우 강력하다는 점을 잘 보여줬다.

이런 유전자 우선주의가 확대되어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일란성 쌍둥이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텔레파시로 소통할 수 있다는 보고도 많이 나오고 있으니, 일란성 쌍둥이에 관한 연구는 앞으로도 더욱 많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스리랑카 등 여러 나라에 쌍둥이 등록소가 있어 쌍둥이 기록을 잘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일란성 쌍둥이가 부샤드 주니어와 시걸의 주장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물론 일반 형제자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같지만 그래도 다른 것이다.

어머니는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차이점을 알아본다. 일란성 쌍둥이와 결혼한 부부는 누가 자기 짝인지 실수 없이 알아보고 자기 짝과 잠자리에 든다. 심지어 가까운 친구들도 알아본다. 일란성 쌍둥이가 흑백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뉴스를 접하고 놀라기도 하고, 쌍둥이 중 한 명만 유전 질환에 걸렸다는 소식도 종종 듣는다. 목소리가 다르고, 같은 환경에서 키워도 성격이 다르다. 거의 같은 시간에 태어났지만 같은 시간에 죽는 일란성 쌍둥이는 없다. 홍체와 지문도 다르다. 한 사람의 왼쪽, 오른쪽 눈 홍채가 다를 수 있다고 하니 일란성 쌍둥이가 다르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유전자가 거의 일치하는 일란성 쌍둥이에서 발견되는 이 차이점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나?

스페인 마넬 에스텔레(Manel Esteller) 교수는 쌍둥이는 일반적으로 어릴 때는 적은 차이를 보이다가 나이 들수록 커진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현상이다. 그러나 IQ나 성격 등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욱 비슷해진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성격과 행동 등 많은 부분에서는 유전적 영향이 아주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대 생물학자 린네를 괴롭힌 괴물 식물 펠로리아

식물학의 시조로 불리는 스웨덴 식물학자 린네(Carl von Linné, Carolus Linnæus)는 세상의 모든 생물은 신이 창조해놓았다고 굳게 믿는 철저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래서 신의 창조계획을 밝히는 일을 자신의 평생 과업으로 삼고, 신이 지상에 선물해준 동식물 분류하는 일을 평생 했다. 그런 그가 난감한 상태에 빠졌다.

어느 날 모 법대 학생이 지방 여행 중 채집한 식물을 동료 교수에게 선물했는데, 이 교수가 진기하다고 여겨 당시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오른 린네에게 연구용으로 주었기 때문이다. 린네는 이 식물을 분류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 식물은 좁은잎해란초(Linaria vulgaris Hill)와 뿌리, 줄기, 잎은 똑같은데 꽃잎만 달랐다. 이 식물이 신의 창조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어 린네는 곤혹스러웠다. 신은 전지전능해 만물을 창조해야만 하는데, 신이 창조하지 않은 식물이 존재한다면 자신이 굳게 믿던 기독교 사상이 근본적으로 흔들린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린네는 이 식물을 펠로리아, 즉 괴물(monster)라고 이름 붙이고 미제로 남겨두었다.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이 펠로리아라는 식물은 그 후 오랜 기간 생존해오며 많은 식물학자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1999년 영국의 코엔(Enrico Coen) 그룹이 꽃잎 모양을 결정하는 LCYC라는 유전자가 만들어내는 단백질이 좁은잎해란초에는 있고, 펠로리아에는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 펠로리아에 없는 이유가 이 유전자 돌연변이 때문이 아니라 후생유전(epigenetics)을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인 DNA에 메틸기(methyl)가 붙어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하였다.

린네가 펠로리아를 받은 해가 1742년이니 약 250년 후에 환경에 의해 DNA 메틸화(methylation)가 일어나 좁은잎해란초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펠로리아가 다른 모습의 꽃잎 모양을 만든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물론 펠로리아는 250년 넘게 펠로리아 자손을 낳고 키우며 생존해 왔다. 좁은잎해란초가 아니라 펠로리아로 생존하며 자신의 모습을 자손에게 대물림해 준 것이다. 즉 유전시켜준 것이다. 유전자가 같은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유전자만 유전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하는데, 혹 이런 학설이 틀린 것은 아닐까?

 

친조부가 어릴 때 굶주리면 손자가 오래 산다

스웨덴 외버칼릭스라는 마을은 스웨덴에서 최북단에 자리 잡은 작고 가난한 마을이다. 비그렌(Lars Olov Bygren)과 카티(Gunnar Kaati)라는 두 학자가 1905년 그곳에서 태어난 199명 중 94명의 수명을 연구한 결과 친할아버지가 9-12세 때 굶주릴수록 손자, 손녀들의 수명이 길다는 것을 통계학적 밝혀 발표하였다.

신기하게도 친할머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손자, 손녀의 수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친할아버지의 배고픔이 친자식, 즉 손자 손녀의 아버지 수명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다.

친할아버지가 굶주릴 때가 13세 이상이거나, 8세 미만이어도 손자, 손녀의 수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많은 학자가 이 연구결과를 황당하다고 여겼지만, 이 연구결과는 그 후 다른 연구 그룹에 의해서도 증명되었다.

이 연구는 더욱 확장되어 정자가 초기 만들어지는 시기, 9-12세에 할아버지가 굶으면, 그 영향이 할아버지 정자에 기억되고, 아버지를 통해 손자, 손녀의 수명에 영향을 미친다고 밝혀졌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고 알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다.

 

아구티 생쥐: 음식물에 따라 털 색깔이 바뀌는 생쥐

생쥐(mouse)는 의생물학 연구에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생쥐를 가지고 연구를 잘하면 크게 성공할 수도 있다. 에반스(Martin Evans), 스미시스(Oliver Smithies), 카피키(Mario Capecchi) 교수는 최초로 녹아웃 마우스(knockout mouse)를 제작하여 2007년 노벨상을 받았다.

생쥐를 의생물학 연구에 쓰도록 처음 기반을 닦은 사람은 하버드대를 졸업한 리틀(Clarence Cook Little) 교수이다. 이 사람은 생쥐 때문에 33세 되던 1922년에 미국 최연소로 미국 메인 대학(University of Maine) 총장, 1925년에는 미시간 대학(University of Michigan) 총장이 되었다. 그 후에는 잭슨이라는 사람에게 기부받은 돈을 이용해 그 유명한 잭슨 랩(Jackson Laboratory)을 만들어 생쥐 사육을 전문적으로 했는데, 잭슨 랩은 지금도 전 세계 연구자에게 생쥐를 공급해주고 있는 명망 높은 연구기관이다.

생쥐와 잘 지내면 이렇게 크게 성공하기도 하니 누가 무슨 일을 하든 각자 영역에서 잘하면 되는 것 같다. 자식들 소질대로 잘 키우면 되니 굳이 의사, 판사 만들려고 자식들 지나치게 볶지 않아도 될 것 같다.

2003년 생쥐 때문에 또 한 명의 교수가 일약 스타 교수가 되었다. 듀크 대학의 저틀(Randy Jirtle) 교수인데, 이 교수는 Avy 변종 아구티 생쥐(agouti mouse) 암컷에게 교미 전 2주부터 출산 때까지 메틸기(methyl)를 공급하는 엽산(비타민 B12)과 메티오닌(methionine)이 추가된 먹이를 먹였더니 노란색 털 새끼 대신 회색 털 새끼를 많이 낳는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엽산과 메티오닌이 추가되지 않은 음식을 먹이면 노란색 새끼가 훨씬 많이 태어났다. 즉 음식에 따라 새끼 털 색깔이 바뀌는 것을 밝혀 저틀 교수가 유명해진 것이다. 그런데 저틀 교수에게 아구티 생쥐를 보내주고 털 색깔이 바뀔 수 있는 음식 재료를 알려준 알칸사스 대학 울프(George Wolff) 교수는 저틀 교수보다 5년 먼저, 1998년에 비슷한 내용을 발표했는데, 크게 조명받지 못했다.

울프 교수가 1999년 은퇴해서 그런지, 세상이 불공평해서 그런지, 운명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구티 생쥐를 이용한 연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저틀 교수가 다 가져가 자기만 유명해졌다. 아구티 생쥐는 그 후 너무 유명해져 지금은 유튜브에서도 많이 소개되고 있다.

아구티 생쥐가 음식에 따라 노란색부터 회색까지 다양한 털 색깔을 가질 수 있다는 연구는 대중에게 시각적으로 선명한 연구결과를 보여주어서 많은 조명을 받았다. 복잡한 내용은 몰라도 털 색깔이 다른 쥐를 본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도 역시 효과적인 소통방법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 예이다. 아구티 생쥐는 색깔 변화를 확연히 보여줘서 이후에 환경호르몬이 생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데에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

 

 

후생유전학(epigenetics)

위 네 가지 사례에서 보듯이 유전자만이 유전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새로운 연구결과는 유전자만이 유전을 결정한다는 학설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를 매우 당혹스럽게 만든다.

이렇게 새로운 방법으로 유전을 결정하는 원인을 밝히는 학문이 후생유전학(epigenetics)이다. 그런데 유전을 결정하는 인자가 유전자와 후생유전 둘 다라고 하면 둘 중 어느 것이 더 유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답은 유전자가 더 강력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쉽게 생각해 보자. 사람이 쥐, 소를 낳는 경우가 없듯이, 쥐나 소도 사람을 낳지 않는다. 생명체에게 있어, 자신의 생명을 지켜가는 일과 자신과 같은 종의 후손을 낳아 대대손손 이어간다는 점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자신의 후손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니, 당연히 유전에 있어 유전자가 후생유전보다 훨씬 강력하고 중요하다. 펠로리아나 아구티 생쥐도 눈에 보이는 모습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 다만 후성유전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에 조금씩 변화를 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점이 때로는 우리 건강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암이나 대사성 질환에 후생유전이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후성유전학도 지금은 많이 밝혀져 잘 정립되어 가고 있다. 후생유전학의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 생체 내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단백질 합성이 후생유전학적으로 조절되어 자신의 표현형을 바꾸는 것은 물론 후손에게 유전까지 된다는 사실이다. 후생유전학적으로 단백질 합성을 조절하는 기전으로는 세 가지가 잘 밝혀져 있다.

첫째, DNAGC 염기서열 부위에서 C 부분이 메틸화(methylation) 되는 것이다. 펠로리아에 나타나고 있는 DNA 메틸화가 대표적이다. 이 기전은 여성 X 염색체 둘 중 하나를 불활성화시키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기전이 잘 작동하지 않으면 X 염색체에 있는 유전자들이 과하게 작동되어 여자들은 죽는다.

일란성 쌍둥이지만 몸과 마음의 상태가 차이가 나는 이유도 유전자에 달라붙는 메틸기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암에서는 DNA 메틸화 이상이 많이 발견되어 이를 치료에 활용하려고도 한다. 그런데, 메틸화에 관한 연구를 매우 열심히 한 초기의 과학자가 한국인 백운기, 김상덕 교수 부부이다.

백운기 교수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김상덕 교수는 서울 여자 의대 (현 고대 의대 전신)을 졸업하고 미국에 가서 1963년부터 단백질에 메틸기가 붙는 것(protein methylation)을 연구하기 시작해 오랜 기간 이 분야에서 대단한 업적을 쌓았다. 부부는 백운기 교수가 70살이 되던 1995년에 그간 재직했던 템플 의과대학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와서 각각 연대 의대와 고대 의대에서 명예 교수로 지내기도 하였다.

이 부부 교수는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내밀었으면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즉 단백질 메틸화를 DNA 메틸화로 전환했거나, 단백질 중에서도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치는 히스톤 단백질 메틸화와 탈메틸화까지 연구를 진척시켰으면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로 대우받을 수 있었는데 매우 아쉽다. 물론 이 부부 교수가 미국에서 살기가 쉽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조금 더 적극적이지 못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도 C 형간염 치료약을 만들기 위해 사이클로필린 A(cyclophilin A)라는 단백질 억제제를 개발해 미국, 유럽, 한국 특허를 취득했지만, 그동안 C 형 간염 치료약이 나와 이미 환자 치료에 쓰이고 있었고, 연구비 심사자들의 몰이해에 낙담하여 이 연구를 중도에 포기했는데 이 약재가 코로나-19 치료제로 개발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매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이 연구를 조금만 더 발전시켜 임상 1상이라도 갔으면 지금 큰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 매우 아쉽다.

주변 문제가 많이 있었지만 내가 포기한 일이니, 결국 나의 소극적 태도가 가장 큰 문제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백운기, 김상덕 교수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과학자는 뚝심 있게 초지일관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둘째, 히스톤 단백질 변형이다. 히스톤 단백질은 실패 같은 역할을 하는 단백질 결합체로서 실이 실패를 감듯이 DNA가 이 단백질 결합체를 감고 있다. 히스톤 단백질이 메틸화(methylation), 아세틸화(acetylation), 혹은 인산화(phosphorylation)되면 DNA와 히스톤 단백질 간 결합에 변화가 생겨 DNA에서 RNA로 전사되는 것에 영향을 준다.

이 결과로 단백질 생산이 조절된다. 이런 연구에서 중요한 공헌을 한 학자로는 록펠러 대학의 알리스(Charles David Allis) 교수가 있다. 알리스는 이 분야의 최초 인물은 아니지만, 현재 이 연구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백상기, 김상덕 교수와는 대조적인 면이 있다. 최초의 발견자가 대부분의 영광을 독차지하는 과학계에서 드문 경우라고 생각한다.

알리스가 다시 관심을 불러일으킨 아세틸트랜스퍼레이저(acetyltransferase)라는 효소의 작용에 대해서는 1970년에 록펠러 대학의 선배 수인 머스키(Alfred Ezra Mirsky)와 알프레이(Vincent G. Allfrey)가 먼저 발표하였고, 1979년에는 스페인 페스타나(Angel PESTAÑA) 교수가 정제에 성공했다. 이런 업적을 바탕으로 알리스 교수가 유명해진 것이다. 최근에는 히스톤 단백질의 다양한 변형들도 발견되어 이 분야는 히스톤 코드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넓혀져 많은 연구자가 매우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

셋째는 다양한 RNA에 의해 단백질 합성이 조절되는 것이다. 이 분야에서는 서울대 생물학과의 김빛내리 교수가 선두 주자 중 한 명이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이 분야가 많은 연구자의 관심을 받게 된 일은 1998년 멜로(Craig C. Mello)와 파이어(Andrew Fire) 교수가 상보적인 두 가닥의 RNA를 주입했더니 단백질 생산이 감소한다는 것을 네이처 학술지에 발표하고 난 후부터이다.

멜로와 파이어 교수는 이 일로 2006년 노벨상을 받았다. 이후에 많은 연구자가 이 분야에서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 의약품으로 개발하려는 시도까지 있으나, 아직 뚜렷한 성과는 나지 않고 있다. 김빛내리, 멜로, 화이어 교수 등은 조그만 RNA에 관한 연구를 주로 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길이가 긴 RNA(long non-coding RNA)에 대해서도 밝혀지고 있다. RNA 기능이 참으로 복잡하다. 일부 과학자는 RNA 분야는 앞으로 100년간 연구자들을 먹여 살릴 정도로 무궁무진할 것으로 예측하기도 한다.

후생유전학이 발전함에 따라 골턴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했던 유전과 양육 (환경)“이 비로소 환경이 후생유전이라는 방법으로 유전자에 영향을 미쳐 유전자가 같더라도 다양한 양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전자와 환경이 통합됨으로써 유전 현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이해를 통해 우리는 재능이나 지능 등 많은 것이 태어날 때부터 DNA 염기서열에 각인돼 있어 어쩔 수 없다고 믿는 운명론을 버리고 교육이나 환경을 개선함으로써 물려받은 유전자의 힘을 후천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분명 우리는 인간의 노력으로 유전자 이상의 일을 해낼 수 있다. 반면에 자칫 잘못하면 좋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으나 잘못 행동함으로써 자신과 후손을 망치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좋은 식습관과 생활 태도가 왜 우리의 심신을 건강하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왜 흡연자,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탄수화물 중독자가 건강하게 살지 못하는지, 이들이 왜 심신이 피폐해지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런 지식을 통해 우리는 태교가 왜 중요한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후생유전학이 발전함에 따라 생물학계에서 가장 멍청한 학설로 여겨지던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새롭게 대두되었다. 라마르크는 기린의 목이 긴 까닭은 기린이 높이 있는 잎을 먹기 위해 계속 목을 빼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이렇게 길어진 목은 후대에 유전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라마르크의 용불용설과 획득형질 유전설은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지 않아도 유전될 수 있다고 왜곡되어 현대 생물학에서 무식한 이론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런데 후생유전학은 살면서 얻은 획득형질도 유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살면서 겪는 많은 일이 우리 유전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확실

살면서 겪는 많은 일이 우리 유전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제 살면서 겪는 일들로 인해 변화된 유전자가 대물림할 수 있는가 하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남아있다.

일부 후생유전학자들은 쥐를 이용한 연구를 통해 유전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일부 학자들은 사는 동안 개인의 유전자에 영향을 미쳐 표현되는 양상을 바꿀 수는 있지만 대물림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후자를 주장하는 근거로는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이 이뤄지면 살면서 겪는 환경 때문에 유전자에 새겨진 각인이 지워지고 수정란이 분화하면서 다시 세포마다 그 역할에 맡는 후성유전학 패턴이 형성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이 근거가 있는 것은 체세포를 이용해 복제 동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체세포를 이용해 줄기세포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자가 가능하다고 처음 보여준 학자는 미국 워싱턴주립대의 스키너(Michael Skinner) 교수다. 스키너 교수팀은 임신한 쥐에 환경호르몬 같은 유해 화합물을 주입한 뒤 태어난 수컷은 대부분 고환이 비정상이고 정자도 허약하고 숫자도 적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연구원이 실수로 이렇게 태어난 새끼들끼리 교배했는데 놀랍게도 여기서 태어난 수컷 새끼들의 90% 이상에서 생식계에 비슷한 이상이 나타났다.

물론 이 교배한 새끼 쥐는 환경호르몬에 노출된 적이 없었다. 그저 할머니 쥐가 아비나 어미를 임신했을 때 잠깐 노출된 게 전부였다. 3, 4대에 걸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당연히 DNA에 돌연변이가 있는지를 열심히 찾았지만 그런 증거를 찾지 못했다.

이후 스키너 교수와 같은 결과, 세대를 이어가는 후성유전학적 유전을 보고하는 연구자들의 논문이 잇달아 발표되어 이제는 이런 대물림도 가능하다고 많은 연구자가 인정하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거부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미궁에 빠진 것이다.

 

결론 -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이다 (We are what we eat)

이제 우리는 유전과 환경이 상호 영향을 줄 수 있고, 심지어 환경에 의한 영향이 대대로 유전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타고난 유전자는 어쩔 수 없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환경을 개선함으로써 자신과 후손을 더 건강하고 유능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고통받는 질병에도 유전적 요인도 있지만 분명 환경적 요인도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살아가는 방법을 개선하면 많은 병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도 있다. 특히 당뇨, 고혈압 등 성인병 예방과 치료를 위해서는 생활습관이 너무 중요하다.

후생유전학을 간단히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이다 (We are what we eat). 더 나아가, 우리는 노력하는 만큼 만들어지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을 후대에 전해 줄 수도 있다. 그러니 노력하고, 또 노력하며 살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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