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기 속에서 품었던 따스한 마음을 그리다

옛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마냥 신나고, 따뜻하고, 정감이 가던 어린 시절.

어느 순간 추억이 된 그 시간들을 그리워하는 나이가 되고, 더욱 그 시절이 그리워져 마음 한편에 사무쳐 간다.

어느 순간 우린 어쩌다가, 시간이 지나니 ‘어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민중예술가인 김상섭 화가는 달동네를 자신의 ‘따뜻한 추억’으로 기억한다.

산업화와 민주화 운동이라는 격변의 시기를 겪어오면서, 잊혀지지 않은 ‘따뜻함’을 ‘집’이라고 말한 그는 ‘달동네’를 소재로 추억 속에 자리한 ‘집’을 그린다.

 

김상섭 화가
김상섭 화가

 

 

내가 살고 싶었던 ‘집’

 

김상섭 화가는 달동네 풍경을 소재로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다.

대중에게 ‘달동네’는 ‘가난’과 ‘삶의 애환’이라는 수식어로 떠올리게 하는 소재로, 그를 ‘민중예술가’로 부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상섭 화가에게 ‘달동네’는 의미가 달랐다. 그는 달동네를 자신이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보았고, 젊은 시절 자신이 가장 살고 싶어던 ‘집’으로 인식했다.

1982년 20살 청년이었던 김상섭 화가는 대학을 다니기 위해 서울에서 상경했었는데, 집을 구하기 위해 서울 내의 달동네를 둘러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도 서울의 집값은 월세 조차 비쌌기 때문에 경기도 일산에서 자취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에 그는 달동네의 풍경들을 보고, “저 수 많은 집들 중 내 몸을 누일 안식처가 단 하나도 없구나”하며 아쉬워했다고 고백했다.

 

달노래, 김상섭 作
달노래, 김상섭 作

 

이후 지금의 아내분과 연애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처가가 달동네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달동네라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둡고, 좁고, 눅눅한 부정적 동네라 여겨지는 것과 달리, 집 안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었다고 한다.

또한, 아내분을 처가에 바래다주고 나서는 달동네의 밤 거리는 환하게 비친 가로등과 집집마다 밝혀진 불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마치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달노래 (2020), 김상섭 作
달노래 (2020), 김상섭 作

 

그가 그린 달동네는 ‘저항’이나 ‘민중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순수한 ‘추억’과 어린 시절 바랐던 ‘안식처’를 의미한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시절, 시골에서 몰려오는 청년들이 생활하던 달동네는 시대가 지나고 점차 쇠퇴하면서 하나, 둘씩 사려져 가는 와중에도 김상섭 화가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람 냄새가 나는 집’을 그렸다.

그가 그린 달동네는 빛바래고 투박한 모습의 집촌의 모습, 또는 어두운 밤 가로등과 창을 통해 밝혀지는 달동네 골목길의 모습 등으로 나타난다.

 

 

그림을 그리다

 

김상섭 화가는 그림을 늦게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유년기 시절에는 그저 평범하게 살았고, 그림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그가 중학교 3학년 시절 우연히 TV에서 열차사고로 양팔이 절단된 초등학생 소녀가 발가락으로 붓을 잡고 난초를 그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때 “저렇게 양팔이 없는 어린애도 그리는데, 사지 멀쩡한 내가 못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집에 있는 창호지를 이용해 먹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막상 그릴 것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서 집안 벽에 걸린 달력 그림을 따라 그렸다고 한다.

그 그림이 동양화였고, 뭣 모르고 그렸던 동양화가 이후에는 대학 전공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많은 대학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격동하던 시기였기에, 그 과정에서 김상섭 화가 역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의 작품들이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김상섭 作 
김상섭 作 

 

특히 그는 선전용으로 많이 이용되던 판화를 접하게 되었는데, ‘노동운동’과 관련된 소재로 작품을 만들었으며, 더 나아가 서양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서양화에서 그는 먹과 수체화 물감처럼 빠르게 마르는 성질을 가진 것과 다르게, 오랜 시간 물감이 잘 마르지 않은 유화에 큰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김상섭 화가는 작품을 만들 때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자신이 느끼는 요소에 가장 부합되는 재료를 이용해 만들며, 장르를 구분하려는 행위 자체를 지양한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느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림에 힘이 있어야 하며,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느낌’은 어떤 대상을 보고 느낀 인상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 놓는 것이고, 그림이 힘있는, 즉 생동감 넘치고 그림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뚜렷해야 함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자유’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함’을 의미하고, 그가 제일 중요하게 강조하는 부분이다.

김상섭 화가는 “옛날 방식에서 벗어나 좀 더 현대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하였고, 동양화든 서양화든 구분하지 않고 자신만의 새로운 기법을 창안해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어떤 고정관념과 같은 틀 속에 얽매이게 하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자유롭게 그리기를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술에 대하여

 

김상섭 화가는 처음에 그림이 잘 팔리지 않아서 공사장 잡역부, 또는 화실 강사로 힘겹게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할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서 ‘예술’은 ‘자신이 존재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며, “물론 그림을 그리지 않고 평범하게 살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본인은 ‘미술’이라는 행위를 통해 좀 더 높은 개념으로서 제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느끼는데, ‘김상섭의 그림은 이거다’고 말할 수 있는 고유의 개성, 즉 자기만의 방법으로 그려내는 것이 자신의 예술이고 존재감에 대한 증명”이라고 말했다.

 

 

 

김상섭 화가는 자신이 ‘민중예술’ 화가로 불리지만, ‘민중예술’은 애초에 없었고 사람들이 그저 지어낸 말이라 말하며, 자신은 그저 자신이 느낀 것을 그림으로 그려낼 뿐이라고 말한다.

솔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려내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도 그가 그려내는 새로운 모습들을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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