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는 어디로 가고

- 서울 아차산행

 

 

광나루역에서 걷기를 시작합니다. 먼저 영화사를 들러 사찰을 돌아보고 아차산성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원래 영화사는 신라 문무왕 때(672년)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지금의 건물은 1997년에 중축한 것입니다.

 

어제 내린 비가 하늘을 대청소했나 봅니다. 서울을 둘러싼 산들과 흐르는 한강의 자태가 눈부시게 투명합니다. 매우 익숙한 이 풍경은 정겹기만 합니다. 한동안 경춘선과 북한강 주변의 산행과 강길에 빠져 뜸했지만, 아차산은 내가 서울에 정착해서 북한산과 관악산 등과 더불어 가장 많이 찾았던 산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처럼 고구려역사길 이정표를 따라 마을길과 작은 언덕을 지나 생태공원에 들어서기도 하고, 아차산역에서 전통시장길을 거쳐 오르기도 했습니다.

 

아차산을 야트마한 이라고 그 의미와 가치까지 만만하게 볼 일은 결코 아닙니다. 서울시와 구리시를 아우르며 흐르는 한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적지로 이곳만한 곳은 더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산 중턱에 조성한 해맞이 광장에서는 매년 새해 해맞이 행사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도 그 행렬에 기꺼이 동참하곤 했습니다.

 

한성벌을 힘차게 흐르는 한강의 속 깊은 물살마저 훤히 보일 듯이 탁 트인 풍광을 즐기며, 바람이 전해주는 전설과 역사 이야기 속으로 산책하듯 걸어가는 매력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봉화산, 망우산, 용마산, 아차산이 제 각각 이름을 갖고 있지만, 예전에는 이를 총칭하여 아차산이라 불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차산이란 이름은 인간의 경솔함에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조선 시대 명종이 점을 잘 보는 홍계관에게 궤짝 속에 든 쥐가 몇 마리인지 물어보았는데, 홍계관이 대답한 숫자가 궤짝 속의 쥐의 숫자와 다르자 사형을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들어 있었고, 그 숫자는 홍계관이 말한 숫자와 일치하였습니다. ‘아차’하고 사형 중지를 명했으나, 이미 사형이 집행된 뒤였습니다. 이후 이 산을 아차산이라 불렀다는 얘기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얼마나 옹졸하고 편협한 자기 굴레에 갇혀, 함부로 경솔하게 말하고 판단하는지, 뒤돌아보고 곰곰이 반성해 볼 일입니다.

 

고구려역사박물관을 지나 등산로 입구에서 귀여운 소년 소녀와 같은 온달과 평강공주의 동상 앞에서 잠시 숨고르기 한 후, 아차산성 쪽으로 올라갑니다. 고구려 보루군이 줄을 서있습니다. 이곳에서 잠시 멈추어 아차산의 풍경과 지정학적인 위치를 살펴봅니다. 불현듯 아차산 이름의 유래를 전설만 믿고 맡겨둘 수 없다는 생각이 바람처럼 스쳐갑니다. 아차산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국운을 가를만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가 아니었던가? 한강을 무대로 중국과 일본을 아우렀던 해상왕국 한성백제. 지금의 풍납토성에 도읍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성백제는 남쪽에 몽촌토성을 쌓고, 한강 건너 이 산에 둘레의 길이가 약 1㎞ 정도 되는 산성을 쌓았습니다. 고구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그러면 어찌하여 아차산에는 한성백제의 흔적은 어디로 가고, 고구려의 역사로 채워졌는가? 흔한 말로 패망한 나라의 역사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 또한 자신들을 버리고 간 나라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제 왕조가 공주로 떠나간 후, 아차산은 고구려와 신라의 최전선이 됩니다. 고구려 온달장군이 이곳에서 신라와의 전투 중 전사했다는 전설도 이즈음일 것으로 추정할 따름입니다. 온달이 정말 이 산에서 전사했는지는 의문이 많지만, 아차산의 전망 좋은 봉우리마다 고구려 보루군 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매우 중요한 군사기지였음은 틀림없습니다.

 

이 산성은 삼국 시대 이래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아단성, 아차산성, 장한성, 광장성 등이 그것입니다. 한자로 표기하면 '阿嵯山', '峨嵯山', '阿且山' 등입니다. 고려 시대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으로 쓰다가 조선 시대에 와서 '아차(峨嵯)'로 교정해서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왕조 시대에는 임금의 이름과 휘호를 감히 쓸 수 없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단(旦)'이란 휘(諱)를 썼기 때문에 '단(旦)'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비슷한 글자인 '차(且)’자를 차용해서 쓴 것이 아차산 이름의 유래라고 생각합니다.

 

망우리 쪽으로 걸어갑니다. 망우리란 말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지금의 구리시에 있는 검암산 밑 동구릉에, 자신의 건원릉과 조상의 릉 등, 구릉을 조성하고 돌아오는 길에 망우리 고개에서 “이제야 한시름을 잊겠다(於斯吾憂忘矣)”고 말한 데서 ‘망우리(忘憂里)’라 불렀다고 합니다. 묘지에 묻히는 것은 고단한 삶의 근심 걱정을 떨쳐버리는 것으로 믿었던 시대의 문화적 속내일 듯하지만, 이곳에 공동묘지가 생긴 것은 실은 매우 정치적인 의도로 기획된 것입니다. 일제는 1933년 이곳에 공동묘지를 조성했는데, 이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묻힌 왕릉 산줄기에 하층민의 공동묘지를 조성함으로써 이미 패망한 조선 왕조의 추락한 권위를 백성들에게 각인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망우리 쪽으로 산을 내려왔습니다. 전설과 역사 속에서도 빠져나왔습니다. 우림시장의 풍성한 술국과 순대로 배를 채우고, 광장시장에 들러 육회와 빈대떡으로 또 배를 보충하니, 배가 산만큼 빵빵하여 기분은 좋은데, 집으로 향하는 발길은 오히려 무겁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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