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정이 훨씬 지나고 죽전 간이 휴게소에서 마지막 일행을 태운 전세버스가 이내 경부고속국도에 접어든다. 실내는 어둠이 찾아오고 모두가 잠드는 침묵의 밤으로 내려앉는 가운데 차창 밖의 소리 없는 불빛만이 새벽을 차지하며 분주할 뿐이다. 28명이 함께하지만, 각자의 시간으로 돌아가 나 홀로 떠나는 무박 여행이 되었다.
신라 천년의 흥망성쇠를 함께하며 신라 사람들의 정서가 밀접하게 녹아있는 경주 석굴암에 도착할 때는 새벽 5시가 넘어서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하늘을 향해 늘어지게 승리를 외치듯이 시원한 기지개를 켠다. 같은 밤을 보낸 사람들이 다가와 새삼스럽게 인사를 나눈다. 늦은 밤에 탑승하면서 얼핏 눈인사만 나눈 까닭에 느끼는 감정이 새로워서이다. 밤새 타고 온 차에 몸을 맡겨 다들 피곤할 만 한데도 두 눈에는 즐거움이 넘쳐나고 가슴에는 행복 하나씩 가득 담겨있다.
비좁은 버스 안에서 저마다 방식으로 아침을 해결한다. 누룽지 몇 줌에 뜨거운 물을 붓고 금세 간편식을 만든다. 가까운 자리의 사람과 서로의 음식을 교환한다. 아니다 그동안 역사 걷기를 통해 다져진 일행과 차라리 정을 나눠 먹는다는 편이 맞을지 모른다.

토함산을 오르기 위해 차에서 내려 24시간 개방된 경주국립공원 관리사무소를 빠져나와 산길로 접어든다. 어느 틈에 곁자리로 찬 공기가 끼어 들어와 옷깃을 여미게 하고 콧속을 파고드는 상큼한 내음은 싫지 않을 만큼 정겹다.
경주의 대표적인 문화재라 할 수 있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고 있는 토함산은 바다 쪽에서 산으로 밀려오는 안개를 들이마신 후 토해내는 모습이라는 데서 붙여졌다 한다. 새벽에 토함산으로 오르는 대열은 흐트러짐 없이 질서가 정연하지만, 이마에서 빠져나온 불빛은 얽히고설키며 자유분방하게 허공을 맴돈다.
어둠이 짙은 오르막이 이어지고 호흡이 점점 거칠어진다. 아직은 덜 여문 겨울 공기 속으로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불빛은 이를 놓칠세라 하얗게 잡아준다. 이따금 어둠 속에 숨었던 토함산의 비경들이 불빛에 반사되어 수줍은 모습을 드러내고 이내 사라진다. 침묵이 지배하는 대열 뒤로 불빛이 화려한 춤을 추며 지나온 흔적을 보여준다.
해발 745m 토함산 정상에 도착했다. 하늘과 맞닿아 경계를 이루며 어스름했든 동해 앞바다에 붉은 기운이 강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가을 바다를 비집고 붉은 해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와락 품 안에 안길 기세로 둥근 모양을 키워온다. 꿀잠을 반납하고 숨 가쁘게 정상에 오른 많은 사람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이들의 소망을 가득 담았을 오늘만의 해가 두둥실 솟아오른 것이다. 일출의 광경이 사진만큼 그야말로 장관이다.

경주의 대표적인 문화제이며 수학여행 하면 피해갈 수 없는 참새의 방앗간 불국사로 이동한다. 불국사 정문을 들어서면 93세 관음송의 싱싱함과 우아한 자태에 압도당하고 월천교를 건너면 더 이상 고치거나 보탤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한 불교 사찰의 결정판인 자하문 아래 국보로 지정된 청운교와 백운교에 이른다. 불국사는 1995년 석굴암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어 있으며 석가탑, 다보탑, 청운교 및 백운교를 비롯해 국보 7점, 보물 4점의 국가지정 문화재를 보유한 관계로 학술적·역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까까머리 소년의 마음으로 돌아가 수학여행 하는 기분으로 불국사의 다양한 불교 문화 체험에 빠져들며 시간이 쌓일수록 추억은 차곡차곡 채워지지만, 이른 새벽에 채워졌던 배 속은 이미 허전하여진 지 오래다. 여행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는 경주시 보불로에 자리한 경주 맛집으로 향한다. 겉으로 드러난 전통 기와집 모양과 달리 식당 내부는 현대적 분위기로 단장하고 손님 맞을 채비가 마친 상태이다. 친분의 정도와 상관없이 선택한 메뉴에 따라 두 패로 갈린다. 황태구이 정식이 대세를 이루지만 후회 없는 구수한 콩이랑 정식으로 빠른 점심을 때우고 기다리는 다음 목적지로 나선다 .
잠깐의 차량 이동으로 첨성대로 향한다. 핑크뮬리가 조성된 곳에 자리한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고 축조 당시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란다.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 것을 빼고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소년의 눈높이에서 바라보았던 커다란 첨성대는 과거 여행으로 사라졌지만, 지금의 첨성대는 왜소해 보인 까닭에 틈새 없이 층층이 쌓인 벽돌 하나하나에서 섬세한 예술적 작품성이 보인다.

걸어서 경주 최씨 고택으로 가는 도중에 고분 지척에서 휴일 오후 가을의 결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감나무의 여유로움이 눈길을 끈다. 옛 도읍을 상징하는 나이 먹은 집들이 보이고 그 속에 소박하고 아름다운 한옥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경주만의 전통을 보여준다. 조용한 골목 사이사이에서 정취 가득한 만추의 바람을 맞으며 경주시 교촌에 자리하면서 경주의 최 부자 집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인 경주 최씨 고택에 이른다.
명부(名富)의 격조와 품격을 갖춘 경주 최부자 댁은 18세기경에 지어진 경주 최씨의 종가로서 조선 시대 양반집의 기본 형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로 알려졌다. 이 집에서 조선 중기부터 12대를 내려오며 만석지기 재산을 지킨 최 씨 집안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 주었던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명문가이다. 가문家紋의 표지標識 중에서 '흉년에 남의 논과 밭을 매입하지 말라`라는 문장은 이 집안의 됨됨이를 잘 말해준다.
교촌의 골목을 잠시 벗어나면 마을 어귀에 경주 김씨 시조의 발상지 계림에 도착한다. 경주 김씨는 7대손 미추 이사금을 시작으로 하여 마지막 경순왕까지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서 신라의 흥과 쇠를 이어갔다. 계림은 신라초부터 조성된 숲으로 아직도 느티나무, 물푸레나무, 싸리나무 등의 고목이 무성하다.

경주 김씨의 출생과 무덤의 비밀을 간직하며 계림과 마주하고 있는 내물왕릉이다. 내물마립간 또는 내물이사금이라는 신라 최고 통치자의 호칭을 이어온 신라 내물왕은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지배 세력을 강화해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 왕이다. 신라의 통치는 박, 석, 김이 독립적인 계보를 이어오다가 김 씨인 내물 이사금이 등극함으로써 비로소 김 씨의 왕위 계승이 확고하게 이루어졌다. 한편, 신라의 많은 고분이 단지 기록으로만 전해오는 공통된 특징이 있어 일부에서 이 능 또한 내물왕릉이라는 주장과 아니라는 의견으로 갈리고 있다.
과거 얼음을 보관했던 석빙고이다. 경주 부윤 조명겸이 나무로 된 목빙고를 사용하다가 매년 개보수하기 어렵다는 민원을 받아드려 조선 영조 때 돌로 된 석빙고를 축조하게 되었다는 데서 지역 관료의 애민사상을 느낄 수 있다. 서울과 안동, 창녕, 영산 등지에 남아 있는 석빙고에 비하여 경주 석빙고 입구에는 세월의 무게만큼 깊게 팬 石氷庫(석빙고)라는 확연한 글씨체와 이맛돌에 석빙고에 대한 변천사가 기록되어 있는 특징이 있어 이런 연유에서 경주 석빙고만이 보물로 지정된 까닭을 나름대로 유추한다.
귀중한 문화재가 곳곳에 널려있는 경주는 차라리 도시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박물관이며 문화재의 보고라는데, 누구인들 고풍스러운 만추의 경주를 다 못 보고 떠나고 싶겠는가. 주어진 하루만으로 넘칠 만큼 가득한 경주를 다 느낀다는 건 한없이 버겁기 때문에 오늘의 나머지를 비워줘야 하는 시간이다. 헤어짐은 마치지 않은 시작의 연장이고 추억이라는 이름이 붙을 따름이란다. 남겨놓은 경주의 일상을 시간으로 묶지 말고 산책하듯 훑어보는 아쉬움은 다음을 기약하기 위한 핑곗거리로 남겨놓는다. 오늘은 먼 훗날 아름다운 추억 하나 곱씹어갈 그리운 그 날로 자리 잡을 소중한 자산이겠기에 오늘의 선택은 분명 수지맞은 투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