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문명의 이기들(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스마트폰 등등)의 발전 상황을 보면 과학기술이 얼마나 얼마나 빨리 변해 왔는지, 앞으로는 또 얼마나 빨리 변할지 눈에 선하다. 발전하지 못하고 변화하에 적응하지 못하면 그 어떤 제품이든 살아남을 수 없다. 의학도 마찬가지이다.

정부에서 시행하고자 하는 ”한방 첩약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에 대해 의학계와 한의학계 간의 대립이 만만치 않다. 좁게 보면 밥그릇 싸움이라고 볼 수 있고, 넓게 보면 의학에서 과학을 어느 정도까지 적용해야 타당한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과 맞닿아있어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과학적 사안을 어느 정도까지 과학적으로 결정해야 미래 우리나라에 바람직할 것인가 하는 더 근본적인 질문과도 연결된 사안이기도 하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지난 150여 년에 걸쳐 걸어온 길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분명한 것은 21세기에는 과학이 국가의 존망 결정에 더욱 중요할 것이라는 점이다.

황제내경은 약 2000년 전에 쓰인 고대 중국 의학서이다. 지금도 중의학의 중요한 자료로 취급된다고 한다. 나 같은 문외한도 이 책에 대해 많은 한의사에게서 자주 들을 정도로 일부 한의사들은 이 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해설서도 출판되었다.
동의보감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당시 의학을 하나로 집대성한 백과사전식 의학서적이다.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명의 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아 1596년(선조 29)부터 1610년(광해 2)까지 15년에 걸쳐 편찬했다. 국보 319-1, 2, 3호로 지정되어 있고,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동의보감은 180여 권이 넘는 의학서적을 포함하여 230여 종의 책을 참고하여 총 25권으로 정리한 것이다. 여러모로 보아도 동의보감은 매우 훌륭한 의학서적임이 틀림없다. 다만 과학기술이 급변하는 오늘날, 400여 년 된 이 책 내용을 지금도 과학적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기록된 대로 환자들 치료에 적용해도 되는가?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왜 의학은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기 위해 계속 발전해야 하는지, 그렇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우리나라 한의학의 19세기 후반 사정을 보며 살펴보자. 사상의학이라는 독창적인 한의학 체계를 전해 준 이제마(李濟馬)는 1837년에 함흥에서 태어나 39세에 무과에 등용됐다. 이제마가 34세 때인 1871년 고종 8년,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첫 번째 아들이 태어났으나 이 왕자는 불행히도 항문 폐쇄로 5일 만에 죽었다.
항문폐쇄증은 5,000명 중 1명 정도 발생하니 명성황후와 조선에 참으로 액운이 낀 것이다. 야사에 의하면 흥선대원군은 수술을 극구 반대했고,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있는 서양 의사들을 초청하여 수술하기를 원했지만 결국 수술받지 못하고 왕자가 죽었다. 흥선대원군은 수술 대신 아기에게 산삼을 잔뜩 넣은 한약을 달여 먹이게 했다고 한다. 당시 허준의 뒤를 잇는 고명한 어의들이 많았을 텐데 그 간단한 수술도 하지 못해 왕자가 죽고 만 것이다. 이를 계기로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은 극도로 반목하는 사이가 되었고, 조선은 결국 망하게 되었다.
한의학은 조정과 백성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해 뒷전으로 밀려나고, 알렌(Horace N. Allen, 안련(安連))과 에비슨(Oliver R. Avison, 어비신(魚丕信) 등 의료선교사들에 의해 구한말 서양의학이 우리에게 전수되었다. 이제마도 많은 백성을 돌보았다고 하나, 밀려오는 서양의학 앞에서 무력했던 것 같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는 알렌이다. 1883년에 신시내티에 있는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2년간 다니고 졸업하였다. 미국 외과계의 황제 홀스테드(William Stewart Halsted)가 콜롬비아 의대를 3년간 다니고 1877년에 졸업한 것과 비교하면 알렌은 1년 적게 의과대학을 다닌 것이다. 1883년 알렌은 의대를 졸업하자마자 의료선교사로 중국 상하이에 갔다가 1884년 조선에 왔다. 고종의 첫째 왕자가 죽은 지 13년 후이다.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때 민영익이 중상을 입자 이를 수술하여 완치시켰다. 입국 3개월 후이다. 이를 계기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어 1885년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을 설립하고 왕실 의사로 임명되었다. 후에 광혜원은 제중원으로 명칭이 바뀐다. 알렌이 제중원의 초대 원장으로 부임했다. 2년짜리 의대를 다닌 사람치고는 대단한 출세이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총알 한 방으로 원시사회를 제압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에비슨은 우리나라 의학발전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토론토 의과대학을 3년간 다니고 1887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5년이 지난 1892년 에비슨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원두우)로부터 해외 선교 제안을 받고 1893년 8월 가족과 함께 서울에 도착하여 제4대 제중원 원장이 되었다. 초기 선교사로 온 의사 중에서 의학을 제대로 공부한 첫 번째 인물이다.
세브란스 ((Louis H. Severance)에게 기증받은 45,000달러를 이용하여 1904년 지금의 서울역 앞 연세 재단 빌딩 자리에 제중원을 신축하였고, 세브란스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병원(Severance Memorial Hospital)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세브란스가 죽자 그의 아들 존 세브란스 (John Severance)가 120,000 달러를 추가로 지원하여 세브란스 병원은 명실상부, 아시아 최고의 병원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1904년 제중원 의학당이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로 개명하게 되었고, 1908년 6월 3일 에비슨에 의해 총 7명이 제1회 졸업생으로 배출된다. 이들이 조선 최초의 면허증을 발급받은 의사들이다.
이후 에비슨은 많은 의사와 간호사를 길러냈다. 면허 1호 홍종은과 7호 신창희는 상해에서, 2호 김필순과 4호 박서양은 간도로 망명해 진료소를 열고 독립군 의사로도 활동했다. 모든 사람이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매던 백정인 부친을 외면할 때 에비슨이 주저 없이 치료해준 일에 감명받아 에비슨의 권유를 받은 박서양은 기독교에 입문해 의사가 되었다. 신분제 사회 끝 무렵 최하층 백정의 아들이 의사가 된 소설 같은 얘기는 이후 드라마로도 다뤄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양의학은 6.25를 겪으며 미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 지금은 전 세계에서도 의료 최강국이 될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간 우리 의사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서양의학은 어떠한가?
서양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of Cos)는 인체는 네 가지 체액, 즉 혈액, 노란 담즙, 검은 담즙, 점액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체액들이 부조화를 이루면 병이 발생한다고 믿었다. 로마 시대 그리스 의사 갈렌(Aelius Galenus=Claudius Galenus)은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이후 1,300년 이상 서양 의사들은 갈렌의 치료법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게 된다.
갈렌의 주 치료법은 사혈이었다. 약물로는 변 등 동물 분비물이나 이상한 장기들, 잡다한 약초, 기도드릴 때 쓴 물 등이 이용되었다. 동의보감이 출판된 해가 1610년이니 이보다 약 70년 전인 1543년 인체 해부학책을 발간한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가 체액 설을 부정하자 이 학설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1793년에는 스코틀랜드 베일리 (Matthew Baillie)가 병리해부학에 관한 책을 출간하였다. 베살리우스는 정상인의 해부학을 정리하여, 베일리는 병리해부학을 통해 의학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이런 이론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서양의학도 임상 면에서는 답보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 마취제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수술실은 도살장에 가까웠다. 통증을 못 이긴 환자들이 수술대 위에서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그런데도 수술을 하며 의사들은 실력을 닦아 나갔다.
1846년 하버드 의대 2학년을 막 마친 몰톤 (William Thomas Green Morton)이 치과 환자를 에테르로 마취시킨 후 발치 하자 환자가 통증을 느끼지 못하였다. 이후 마취학은 급격히 발전했다. 프랑스의 위대한 미생물학자 파스퇴르 (Louis Pasteur)는 1860-1864년 사이 세균이 부패와 감염의 원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스코틀랜드 외과 의사 리스터 (Sir Joseph Lister)는 파스퇴르 학설에 영향을 받아 1867년 소독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외과 수술에 적용하여 수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도록 했다. 불과 150여 년 전 일이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은 1854년 크림 전쟁에 참전 중인 영국군 병사들이 전장에서 죽는 것보다 훨씬 많게 의약품 부족, 열악한 생활환경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이팅게일은 파스퇴르 이전에 활동했기 때문에 세균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였지만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여 사망률을 크게 줄였다. 마취와 소독법이 개발되어 서양의학에서 외과는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서양의학에서도 비교적 안전하게 수술을 할 수 있게 된 시기는 명성황후 첫째 아들이 항문 폐쇄로 죽은 1871년보다 불과 몇 년 전이었다.

유방암 치료를 예로 서양의학에서 치료법 개발의 역사를 살펴보자.
홀스테드(William Stewart Halsted)는 외과 의사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미국 존스 홉킨스 병원을 오늘날의 세계적인 병원으로 만드는데 지대한 공로를 한 외과 의사이다. 홀스테드가 콜롬비아 의대를 졸업한 1877년 당시 미국 의학계는 의사들이 고름 통을 들고 병실을 뛰어다닐 정도로 위생 관념이 엉망이었다. 의사들도 환자들의 동맥을 잘라 사혈 하거나 마구잡이로 하제를 써댈 정도로 실력이 형편없었다. 유럽에 유학하고 귀국한 홀스테드는 리스터의 무균 수술과 몰톤의 마취법을 더욱 발전시켜 수술 시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근치 유방절제술을 비롯한 다양한 수술법을 개발해 미국 외과 수준을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요즘 외과 의사들이 사용하는 수술용 장갑도 개발하였다. 홀스테드가 완성한 근치 유방절제술(radical mastectomy)이란 암에 걸린 유방은 물론 그쪽 가슴 근육과 임파선 등 주변 조직을 철저히 도려내는 것이다. 홀스테드는 이 수술법을 사용하여 수많은 여성의 유방과 가슴을 도륙하였다. 홀스테드는 가슴을 철저히 더 많이 잘라내는 수술이 환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유방암이 재발하는 까닭은 동정심에 빠져 작은 친절을 베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홀스테드의 제자들은 한술 더 떠 초 근치 유방절제술 (ultra-radical mastectomy)을 개발해내었다. 유방암 수술을 받은 여자들은 가슴살은 물론 어깨뼈, 갈비뼈, 빗장뼈마저 제거당해 앞가슴 전체가 텅 비게 되었다. 때로는 팔에 있는 임파선이 막혀 팔이 코끼리 다리처럼 붓기도 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홀스테드는 의료과실로 엄청난 고소를 당할 수도 있었지만, 당시 서양의학은 이런 수술을 당연한 일로 인정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당시 암 전이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니 도리가 없었다.
1937년 영국 경제학자 존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의 동생 제프리 케인즈(Geoffrey Langdon Keynes)는 미국 외과학회에서 근치 유방절제술을 끔찍한 수술이라고 하며 홀스테드를 정면으로 반박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클리브랜드 클리닉 (Cleveland Clinic)을 세운 사람 중 한 사람인 크라일(George Washinton Crile, Sr)의 아들 주니어 크라일 (George Barney Crile, Jr)도 홀스테드 제자들에게 배웠지만, 근치 유방절제술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홀스테드의 제자들이 외과계를 장악하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당시 외과 의사들이 크라일을 배척한 이유는 근치 유방절제술에 대한 맹신도 있었지만, 금전적인 이유도 있었다. 외과 의사들은 수술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치료비를 받을 수 있었으니 근치 유방절제술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언제 어디서나 의료행위는 돈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이 의료계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성역으로만 생각했던 의료현장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사회적 변화에 따라 외과 의사들이 유방암 환자들의 유방과 가슴 근육과 갈비뼈와 빗장뼈, 심지어는 어깨뼈까지 지나치게 잘라 여성을 흉측하게 만들어 버리는 근치 유방절제술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근치 유방절제술은 그때까지 과학적으로 제대로 검증된 적도 없었다. 크라일의 친구로서 “침묵의 봄 (silent spring)”을 써서 우리에게도 친숙한 저명인사 레이첼 카슨 (Rachel Louise Carson)도 근치 유방절제술을 거부하고 방사선치료를 받았다. 비록 카슨은 유방암으로 사망하였지만, 이렇게 근치 유방절제술은 서서히 무너졌다.
근치 유방절제술에 마지막 펀치를 가한 사람은 피셔(Bernard Fisher)다. 피셔는 최소한의 수술과 방사선 요법 그리고 화학 요법으로 유방암 치료법을 개선함으로써 홀스테드 이후 75년간 지배해 온 근치 유방절제술을 영구히 추방해 버렸다. 자기들 밥그릇이 줄어든 외과 의사들은 당연히 피셔를 배신자로 낙인찍었고, 피셔는 끝내 이 연구를 했다는 이유로 화를 당하고 만다.
1990년 몬트리올 병원에서 시행한 임상시험 결과에 잘못이 있다는 것을 동료 학자가 발견하고 이를 상부 기관에 보고하였다. 피셔의 연구결과에 따라 새로운 유방암 치료법으로 치료받은 환자들은 크게 분노하였다. 이를 계기로 미국 암 연구소 (National Cancer Institute)와 피셔의 모교 피츠버그 의대에 있던 적들은 피셔를 NSABP의 의장직과 교수직에서 쫓아버린다. 피셔는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법정 투쟁에 들어갔다. 3년 반 후에 무죄 선고를 받고 2백 50만 달러 이상의 보상금을 두 기관으로부터 받아낸다. 몬트리올 대학의 실수가 있었으나 피셔가 제안한 치료법은 여전히 타당성이 있다고 판정되어 현재도 표준 유방암 치료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피셔는 대규모 연구를 과학적 방법으로 정확히 시행하여 동료 외과 의사들의 반발을 억누를 수 있었다. 대단한 용기이고 희생이다.
1891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에서만 50만 명의 여성들이 근치 유방절제술을 받았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보면 훨씬 많을 것이다. 일부 환자는 원해서, 또 다른 환자들은 의사들이 권해서 이 수술을 받았을 것이다. 너무 잘라버려 흉측하게 변한 몸매를 바라보며 이 여성들은 하지만 참으로 기가 찼을 것 같다. 이 여성들이 피셔의 연구결과를 알고서 얼마나 낙담하였을까? 홀스테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약 100년간에 걸쳐 여성들에게 가한 의료과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나 홀스테드가 있었기에 케인즈, 크라일, 그리고 피셔가 나올 수 있었다. 더구나 항암요법이라는 것이 없었던 시절에 외과 의사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암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불행히도 그때는 의사들도 그 정도밖에 알지 못하였다.
50만 명 이상이 근치 유방절제술로 피해당했다 해도 이런 실수를 통해 의학이 발전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대과 없이 의학이 발전하였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의학의 발전에는 이런 피로 얼룩진 역사가 있다. 어쩔 수 없어 보인다. 훌륭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특히 외과 의사들은!
지금은 최소한 절제 수술, 방사선 치료요법, 개량된 항암요법 등을 통해 유방암 완치율은 매우 높다. 부득이 유방을 절단하면 유방 복원술을 이용해 여성의 아름다움을 최대로 유지해준다. 홀스테드가 이런 요즘 행태를 보면 깊이 후회할 것 같다.
유방암 치료법 발전에 발맞춰, 다른 암 치료법도 발전하였다. 기초 연구를 통해 암에 관한 지식도 많이 얻었다. 일부에서는 암 연구가 환자보다 암 연구자들을 더 먹여 살렸다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많은 돈이 연구에 투입되었다. 그런 결과로 요즘 암 치료에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우리 한의학도 발전하기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다. 기초 한의학 강좌에는 한의학 고유의 강좌에 더해 해부학, 생리학, 생화학, 병리학 등 현대의학 강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일부 한의대에서는 이런 강좌 내용이 의대보다 더 많다. 아이러니이다. 한방병원에서도 영상의학이나 혈액검사 등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아 환자를 치료한다. 한방 이론과 장비만 가지고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경험하기 때문이다.
TV 건강 프로그램에 나오는 한의사들은 현대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에 기반해 치료법을 설명하기도 한다. 한의학 이론이 너무 어려워 일반인들이 받아드리기 어려우니 이런 방법을 취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현대의학과 과학이 이루어 놓은 다양한 이론과 연구결과를 습득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한의사와 한의학자는 2000년 전 황제내경이나 400년 동의보감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약 비방을 주장하는 한의사들이 이런 과거 속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된다.
홀스테드에서 피셔에 이르기까지의 고통 어린 시행착오와 발전을 피해서는 한의학은 절대 현대의학과 경쟁할 수 없다. 정부에서도 이런 점 냉철히 인식하고 한의학 지원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과학은 “우리 것이 좋은 것이야“ 하는 식의 민족주의나 온정주의는 허락하지 않는다. 오로지 객관적 데이터를 가지고 검토하고, 검증하고, 비판하고, 개선하는 태도만이 발전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한약재는 복잡하다. 전체는 부분보다 낫다는 점은 타당성이 있다. 그래서 한의사들은 한약재에서 단일성분 밝히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다양한 약재를 섞어 첩약으로 만들어 이용해 왔다. 그런데 첩약에는 표준화시키기 매우 어려운 문제가 있다. 한 알의 과일도 부위별로 다를 수 있고, 한 농장에서 자라는 채소도 자라는 위치에 따라 맛이 다르다. 한약은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표준화해야 한다. 저명한 한의학 교수들이 처방했다고 해서 첩약이 현대 의약품과 같은 정도의 객관적인 임상시험을 통과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미국 FDA가 노벨상 받은 의학자 몇몇에 휘둘려 그들의 주장대로 의약품 허가를 내주는 일은 절대 없다. 오로지 과학적 데이터에만 의존한다. 한의사 개개인이 알아서 처방하는 첩약은 철저한 임상시험을 거치지 않아 약품으로서는 부적합하다. 동의보감에 기록되어 있고, 수많은 임상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문제가 해결된 후에나 국가 인증 한의약품이 되어 건강보험 적용을 받는 것이 타당하다.
한의사마다 다를 수 있는 첩약을 국가가 인정하고 비용을 지급하는 것은 너무나 비합리적이다. 한의학자들도 이런 점을 인식하고 식약처의 h-GMP를 통과한 규격품 한약재를 사용해야만 요양급여로 인정받게 했다. 진단 과정을 표준화하겠다고 한다. 첩약의 급여일수와 처방횟수를 제한했다. 급여설계안대로 첩약 처방과 조제 단계가 충실히 이뤄지는지도 확인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정도만으로는 미국 FDA를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은 한의학자들도 동의할 것이다. 병원에서 쓰는 모든 의약품은 미국 FDA를 통과한 약품들이다. 미국 FDA가 중시되는 까닭은 세계적인 수준에서 약품의 효과와 안정성을 엄격히 심사하기 때문이다. 우리 한의학도 세계적으로 인정되고 통용되는 수준의 의학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최근 경희대 한의대 교수 한 분은 동의보감에 기록된 몇 가지 약재를 선정하여 항암제로 개발하고 있다. 임상시험은 국내 대형 병원에서 하고 있다. 이 한약은 제약회사에서 표준화 규정에 따라 캡슐 형태로 제조되고 있다. 개발 중인 한약이 임상 3상을 통과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이렇게 제대로 된 임상시험을 통해 검증되고, 제조는 제약회사에서 규정에 따라 이루어진 한약만이 의료보험 청구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 정부도 한의학이 진정으로 세계시장에서 인정받는 의학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정책을 펴야 한다. 당근 정책만이 능사는 아니다. 당근과 채찍이 동시에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20세기 문명의 이기들(전화기, 전등, 전기, 자동차, 비행기, 열차, TV, 컴퓨터, 스마트폰, 세탁기, 에어컨 등등)의 발전 상황을 보면 과학기술이 얼마나 얼마나 빨리 변해 왔는지, 앞으로는 또 얼마나 빨리 변할지 눈에 선하다. 발전하지 못하고 변화하에 적응하지 못하면 그 어떤 제품이든 살아남을 수 없다. 의학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한의사들 힘만으로 거대한 현대의학과 비견할 수 있는 한의학을 만드는 것은 불가할 수 있다. 아직도 많은 분야의 우리 학문 수준이 그렇듯 한의학도 첨단은 아니다. 한의학은 오로지 중의학과 교류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한의학이 처한 매우 어려운 점이다. 대부분 학문을 우리는 선진국에서 배웠고 아직도 배우고 있다.
한의학을 배척하거나 고사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듯이 환자 잘 치료하면 그것이 바로 좋은 의학이다. 서양의학, 한의학, 현대의학으로 구별하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다.
한의학에도 좋은 점이 많다. 미국에서는 한의학을 대체의학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대체의학이라고 인정되었다고 자랑할 일은 전혀 아니다. 대체의학은 그저 대체의학일 뿐이다. 그래도 우리 한의학자들이 한의학을 현대화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세계 속의 한의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의학계도 작은 이익을 탐해 너무 서둘러 떼쓰듯 정부를 압박하기보다는 스스로 발전하여 누가 검증하더라도 과학적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의학으로 정립해 나가야 한의학이 소비자들로부터 버림받지 않고 계속 생존할 수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그렇게 처신해야 할 것 같다.
과학이 뒷받침하지 않는 의학은 그것이 무엇이든 미신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