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TX청춘 열차가 평내호평역에 섰습니다. 대부분의 산이 그렇듯이 천마산 가는 길도 여러 곳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나도 경춘선 천마산역에서 출발하는 등산로를 따라 산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천마산역은 ITX청춘 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일반 열차만 정차하기 때문에 잘 이용하지 않을 뿐입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ITX청춘 열차는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급행열차이고, 일반열차는 상봉역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ITX청춘 열차를 주로 이용하는 것은 빠르기도 하지만, 우선 동작동 집에서 상봉역보다 훨씬 가깝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서둘러 배낭을 메고 천마산으로 갑니다. 천마산이란 이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이 산의 아름답고 웅장한 형상을 보고 “내 팔이 석 자만 길었으면 하늘을 만지겠다”고 말하였다는 일화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천마산 버스 종점 등산로 진입로 앞에 수진사가 있습니다. 어찌 그냥 갈 수 있으랴. 수진사 경내로 들어갑니다. 수진사는 그리 오래된 사찰이 아닌 듯합니다. 안내문을 찾아보니 1984년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비록 창건 연대는 오래되지 않았어도 웅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넓은 마당과 조형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일주문을 첫 문으로 들어와 천왕문을 지나 불이문을 거치도록 설계했다고 합니다. 불이문을 지나면 완전한 불법의 세계이며, 부처님의 영토라고 합니다. 삶과 죽음이 따로가 아니며,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둘이 아니며, 현재와 미래가 구분이 없다는 알쏭달쏭한 나라라고 합니다. 불이의 진리로써 모든 번뇌를 벗은 해탈의 나라라고 하는데, 나는 심오한 해탈은 고사하고, 단순한 의미도 깨닫지 못하는 우둔한 중생의 걸음으로 이 모든 문을 지나왔으니 어이하랴......
산신각을 지나 풍경 좋은 양지에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9층 석탑이 솟아 있습니다. 그 앞에서 11m나 되는 부처님이 은은한 눈으로 탑을 바라보며 옆으로 누워있습니다. 봄빛에 젖어 있는 나른한 표정입니다. 맑은 햇빛을 받으며 생각에 잠겨있는 듯한 와불은 평화롭기만 합니다.
포장이 잘 되어 있는 임도 위로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볕. 이마에 맺히는 땀을 훔치며 계곡 옆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갑니다. 흐르는 물소리도 정겹기만 합니다. 이윽고 가파른 오르막이 연속입니다. 숨이 가빠지고 발이 무거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간간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가슴을 풀면, 상쾌하고 달달한 흙냄새인지 봄 향기인지에 이끌려 견뎌낼 만합니다.
우람한 바위가 막아서고 있습니다. 임꺽정바위라고 합니다. 서울에서 가까우면서도 산새가 험하고 높은 이 산에서 임꺽정이 비밀스럽게 활동했다고 합니다. 이 바위에 올랐으니 곧 정상(812m)입니다. 하지만 산은 순순히 정상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몇 번 바위능선을 엉금엉금 올라갑니다. 그렇게 애써 오른 정상에서 바라보는 남양주의 넓은 들과 굽이쳐 흐르는 한강의 조화는 수려한 연속 필름입니다.
돌핀샘바위 쪽으로 발을 옮기면 진달래 능선입니다. 내 키보다 훨씬 웃자란 진달래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꽃 필 때 오면 연분홍 터널로 이어진 환상적인 길이 될 것 같습니다. 보구니바위를 지나갑니다. 이른 봄 산행의 하산 길은 더디기만 합니다. 겨우내 얼었던 등산로는 물기에 젖어 있고, 그 위에 나뭇잎이 깔려 있어 매우 미끄럽기도 합니다. 질퍽한 살얼음의 흉기가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져 다칠 위험한 길입니다.
천마산 산행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오늘은 유독 힘들고 낯설기만 한 것도 이런 계절적 환경 탓일 듯도 합니다. 같은 길도 새롭게 느껴지고, 새로운 방식으로 걸어야 했습니다. 그게 길인가 봅니다. 같은 장소라도 조금만 벗어나면 새롭고 낯선 길이 되나 봅니다. 새롭고 낯선 길은 조금 더 번거롭고 수고스러움은 있어도, 그 보다 멋진 호기심과 신선함에서 오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길을 걷는 즐거움이란 낯선 곳에서 낯선 나를 만나고 싶은 기대감일 듯도 합니다. 삶이라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팔현리계곡으로 맑은 물이 흘러내립니다. 물소리가 제법 경쾌하고 어디선가 새소리도 들려옵니다. 그 옆으로 쌓인 낙엽을 헤집고 작고 앙증맞은 하얀 꽃이 살짝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크고 작은 여러 유형의 카메라로 이 작은 꽃을 찾아 찍는 일군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대략 20여 명은 될 듯합니다. 그들의 사진 찍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앞으로 포복하여 찍기도 하고, 무릎을 꿇거나 옆으로 누워 찍기도 합니다. 궁금하여 물어보니 그 꽃이 너도바람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서울에서 온 사진동우회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매년 이때쯤 이곳에서 너도바람꽃을 찍는 행사를 한다고 합니다. 높은 산 골 깊은 계곡에도 봄 오는 소식은 잊을 수가 없나 봅니다.
계곡 아래로 내려올수록 물은 오남저수지를 향하여 경쾌하게 달려갑니다. 나만 호반의 길을 룰루랄라 걸어갈 뿐입니다. 수변길을 따라 노을이 마중을 나오고 있습니다. 호수 위로 긴 수묵화가 그려지는 봄날입니다.
천마산의 봄
이른 봄 아침 햇살 돌탑을 서성이니
수진사 와불 실눈에 너도바람꽃 피었네
겨우네 언 가슴 풀어 촉촉이 젖은 능선
나뭇잎 덮인 산길 질퍽하고 미끄럽다고
조금 더디고 힘들어도
새로운 방식으로 걸어가라 하네
삶의 여정도 그러하다고
숨 가쁘게 바람 달려와 말을 던지네
팔현리 계곡 버들피리 신곡 발표한다고
오남저수지 벌써 노을 무대 차렸네
(졸시, 천마산의 봄,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