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
권력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그토록 권력을 갈망하는가?

 

 

정릉역 2번 출구로 나오자 환한 햇빛이 눈을 때립니다. 번잡한 생각이 길어지는 밤 언저리에서 수면 결핍의 공격을 받은 눈물샘이 흔들립니다. 얼른 선글러스로 눈을 가리고 투덜투덜 정릉길을 걸어갑니다.

정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입니다. 그녀는 고려의 권문세가인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태어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최초의 국모가 되어 무안대군 방번과 의안대군 방석, 그리고 경순공주를 낳았고, 13968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성계는 신덕왕후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그녀와의 러브스토리는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지금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회자되기도 합니다. 이성계가 고려 변방의 장군으로 있을 때, 사냥을 나와 우물가를 지나면서 물을 청하자 급하게 마시면 체할 것이 우려되어 버드나무 잎을 띄워 물을 건넸다는 일화의 주인공입니다.

변방의 촌스러운 무인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준 명문 가문의 딸이자 정치적 조력자이기도 했던 그녀가 죽자, 이성계는 대궐과 가까운 곳에 취현방을 짓고, 능의 동쪽에 흥천사라는 원찰을 지었습니다. 원찰은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사찰을 말합니다. 이성계는 흥천사에서 그녀에게 재를 올리는 아침 종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아침 수라를 들었다고 하니, 그 애틋한 사랑이 오죽했으랴!

능을 지키는 도래솔은 여전히 푸른데, 굽은 늘솔길 저편에서 아스라이 멀기만 했던 단풍이 어느새 바짝 다가오고 있습니다. 염천의 유품과 기억이 체 정리되기도 전에 낙엽이 지는 것처럼 또 첫눈이 오겠지. 세월이란 이렇게 예고 없이 오는 것. 어찌 인간사인들 이 견고한 우주의 시계를 피할 수 있으랴. 조선이 건국되고 그녀는 세자 책봉 문제로 이방원과 갈등을 겪게 되었고, 결국 그 화약은 터지고 말았습니다.

신덕왕후는 조선 개국의 설계자 정도전과 힘을 합해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이성계를 설득했습니다. 이성계의 첫 부인 신의왕후 한씨는 62녀를 낳고 조선 개국 전에 숨을 거두었는데, 그녀 소생의 아들 중 특히 5남 이방원의 조선 개국의 공은 지대했습니다. 결국 이방원은 세자 책봉 문제로 왕자의 난을 일으켜 한때 스승이요 동지였던 정도전을 척살하고 3대 태종으로 등극했습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그토록 권력을 갈망하는가? 본능적인 생존 도구의 하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완벽하게 지배하든 종속되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 있는 방어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권력은 빈 독을 채우고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그럴듯한 양날의 칼이요, 명분이요,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방원의 칼날이 그녀의 능을 향했습니다. 결국 신덕왕후의 능은 도성 밖인 이곳으로 쫓겨났습니다. 능에 쓰였던 석재 등 시설물도 청계천 광통교를 만드는데 쓰도록 했습니다. 뭇 백성이 밟고 다니도록 한 것입니다. 처절한 복수의 칼날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움켜쥔 자의 편이고, 때로는 철저한 살풀이의 무기가 되곤 합니다.

흥천사를 거쳐 성심여대 쪽으로 내려옵니다. 정릉과 흥천사 주변에는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지만, 숲은 건강한 쉼터가 되어 사람을 맞이하고 또 보냅니다. 정릉길을 걷는 사람들은 신덕왕후와 이방원과의 권력투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아무리 매서운 광란의 태풍도 그때뿐, 세월의 솔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고 잊히는 것이 인간사입니다.

사람들은 그녀와 이성계와의 사랑만을 기억합니다.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흥천사 앞마당에 만개한 들국화처럼 여전히 길손의 눈과 발을 붙잡고 말을 전합니다. 연신 들려오는 맑고 아름다운 새소리처럼, 결국 세상에 남아있는 것은 언제나 러브스토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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