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026년부터 2032년까지 7년간 총 9,408억원을 투입하는 범부처 차원의 초대형 의료기기 연구개발사업(2기)을 공식 발표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단순한 연구비 지급을 넘어 기초연구에서 제품화, 임상시험, 인허가까지 전주기(全週期)를 아우르는 ‘원스톱’ 지원체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목표는 명확하다: 세계 최초 또는 최고 수준의 기술로 분류될 수 있는 ‘게임체인저’ 의료기기 6건을 개발하고, 국민의 필수의료를 뒷받침하는 핵심 의료기기 13건을 국산화해 수입 의존구조를 허무는 것. 재원은 국고 8,383억과 민간자본 1,025억이 결합된 구조로 설계돼 공공의제와 민간의 시장성 판단을 동시에 반영한 방식이다.

이번 사업은 2020년 시작된 1기 사업의 성과를 잇는 후속 조치로, 1기에서는 467개 과제가 지원되며 최근 5년(2020~2024) 동안 국내외 인허가 433건, 기술이전 72건, 사업화 254건 등의 가시적 결과를 냈다. 눈에 띄는 사례로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인공신장용 혈액여과기 국산화와 세계 최초로 상용화된 AI 기반 뇌경색 진단보조 소프트웨어 개발이 있다. 이 같은 성과가 단절되지 않고 산업 생태계 전반으로 확산되려면 단순 연구비 이상의 제도적·자본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2기가 설계됐다.

전략적 포커스는 ‘미래 유망분야’다. 구체적으로 인공지능(AI), 로봇, 정밀의료, 디지털헬스 등 기술 융복합 영역을 중점적으로 지원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기술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업 설계는 크게 세 축으로 움직인다. 첫째, 기초·원천 연구에서 기술적 타당성(TRL)을 끌어올려 프로토타입을 확보하는 R&D 단계, 둘째, 규제·윤리 문제와 복합적으로 얽힌 임상시험·인허가 단계의 동시 지원, 셋째, 제조·품질관리(Quality)와 대량생산 체계 구축을 위한 산업화·사업화 패키지다. 이 세 축을 동시에 지원함으로써 ‘연구 성과는 있으나 시장에 안착하지 못하는’ 기존의 병목을 해소하려는 게 핵심 로직이다.

그러나 정책 목표와 현장 현실 간 갭(격차)은 여전하다. 첫째, 임상시험과 인허가 단계의 비용·기간·전문성 문제다. 고위험(High-risk) 의료기기의 경우 다국가 임상, 규제기관과의 밀접한 사전협의(PRE-Submission), 그리고 해외 인증(CE, FDA 등)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는 자금과 규제 전문성을 동시에 요구하므로 단순 연구비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둘째, 상용화를 위한 제조 역량과 공급망 확보 문제다. 의료기기 대량생산은 단순한 조립을 넘어 의약품과 유사한 품질시스템과 추적관리, 클린룸·검증 장비 등 높은 초기투자가 필요하다.

셋째, 의료현장 수요와의 미스매치 문제다. 병원은 실제 사용성과 비용효과성을 근거로 제품 채택을 결정하므로, 임상 초기부터 병원·의료진과 공동으로 설계하지 않으면 상용화가 지연된다.

넷째, 투자 회수구조와 시장성 검증의 어려움. 의료기기 스타트업이 임상·인허가 단계를 거치는 동안 자금 조달을 지속하려면 벤처투자, 기업형 액셀러레이터, 대기업·제약사와의 전략적 제휴가 필요하다.

정부는 이러한 난제를 인지하고 사업을 설계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설명회에서 제시된 주요 운영 원칙을 보면, 연구자·기업·임상기관 간 컨소시엄 모델을 표준화하고, 임상·규제 전문가를 조기 투입해 제품 개발 단계에서부터 ‘인허가 설계’를 병행하도록 유도하는 점이 포함돼 있다. 또한 민간자본 유치를 위한 매칭펀드, 시제품 제작 지원, 파일럿 생산 라인 구축 지원 등 산업화 단계의 실질적 비용을 분담하는 방안도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정책 성공의 관건은 실행 세부안과 집행의 일관성이다. 예컨대 연구성과가 실제 의료현장에서 사용되려면 보험수가, 의료급여 체계 내 채택 여부, 병원 구매 프로세스 등 보건의료 제도와의 연계가 필수다. 즉, 단순 기술개발에서 끝나는 R&D가 아니라 제도·시장·임상 통합형 로드맵을 얼마나 촘촘히 짤 수 있느냐가 승패를 가른다.

 

 

글로벌 관점에서도 이번 투자는 시의적절하다. 전 세계 의료기기 시장은 디지털 전환, 고령화, 만성질환 증가 등 구조적 수요 증가로 인해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특히 AI 기반 진단·모니터링 솔루션과 수술·재활용 로봇은 향후 고부가가치 영역으로 평가된다. 한국은 반도체·제조업 역량, ICT(정보통신기술) 인프라, 우수한 의학연구 인력 등 강점을 보유하고 있어 전략적 투자와 제도 정비만 병행된다면 글로벌 니치(틈새) 시장에서 충분히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다만 국제 인증을 획득해 수출 루트를 개척하는 순간부터는 현지 규제·의료관행·보험체계 적응 문제가 복합적으로 대두되므로 초기부터 글로벌 파트너와의 공동개발·파일럿을 병행하는 것이 안전하다.

연구자와 기업 입장에서 당장 고려해야 할 실무적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연구계획서 단계에서 ‘임상 적용 가능성’과 ‘시장 가치’를 명확히 기술하라. 기술적 우수성만으로는 선정이나 투자 유치에서 유리하지 않다. 둘째, 인허가 전략과 데이터생성 플랜을 초기에 수립하라. 규제기관 요구에 맞춘 임상 설계와 품질관리계획(QMS)은 필수 조건이다. 셋째, 병원과의 조기 연계를 통해 실사용 데이터를 확보하라. 의료진의 사용성(UX) 피드백과 실제 환자 결과는 상용화 시 강력한 무기가 된다. 넷째, 제조·공급망 파트너를 조속히 확보해 시제품에서 확장생산으로 매끄럽게 넘어갈 준비를 하라. 다섯째, 글로벌 진출을 염두에 둔 지적재산권(IP) 전략과 해외인증 로드맵을 병행하라.

정부의 설명회는 연구자·산업계에 사업의 기조와 참여 절차를 안내하는 첫 신호탄이었다. 향후 과제 공모 일정, 예산 배분 세부안, 평가 기준 등 실무 규칙이 확정되면 현장 반응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성공적으로 집행되면 이번 사업은 단순한 기술 지원을 넘어 의료산업 생태계 재편의 촉매가 될 수 있다. 반면 집행 지연, 규제 병목, 민간 유인 부족 등 현실적 제약이 누적되면 성과가 표류할 위험도 크다. 따라서 정부와 연구현장 간의 지속적 소통, 민간자본과의 협업 모델, 그리고 의료현장과의 긴밀한 연계가 평행선을 그리지 않도록 설계·감시·보완하는 거버넌스가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투자는 단순한 R&D 예산이 아니라 ‘의료기술 주권’과 ‘산업 전략’의 문제다. 핵심 의료기기 국산화는 비용 절감과 공급 안정성 확보라는 직접적 이익을 가져오며, 게임체인저급 제품은 의료서비스의 질적 변화를 통해 국민건강에 미치는 파급력이 크다. 연구자·기업·의료기관·정부가 각자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 협력의 틀을 실질적으로 작동시킬 때, 한국은 단순한 추격자가 아니라 의료기기 분야에서 주도권을 잡을 기회를 현실화할 수 있다. 이번 사업이 그 출발점인지, 아니면 또 하나의 정책적 시도에 그칠지는 앞으로 집행과정에서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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