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사상에서 불교·의학·조각·공예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다양한 층위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 9건이 새롭게 보물로 지정됐다. 이번 지정은 단순히 오래된 유물을 국가가 보호하는 차원이 아니라, 조선 후기와 고려, 나아가 신라 시대에 이르는 사상과 기술, 예술과 생활의 결을 입체적으로 복원해낸 사건으로 평가된다. 국가유산청은 이를 통해 한국사 연구의 새로운 토대를 마련함과 동시에, 문화재의 보존과 활용을 병행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가장 주목받는 자료는 단연 『박제가 고본 북학의』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가 청나라 연행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이 친필 고본은, 단순한 문헌이 아닌 조선 개혁 사상의 정점으로 꼽힌다.

 

 

특히 당대 또 다른 거장 박지원의 친필 서문이 함께 남아 있어, 조선 실학의 두 기둥이 서로 교감한 흔적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다. 원고 곳곳에 남은 첨지와 첨삭은 저자가 사상과 정책을 어떻게 다듬어갔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편집 기록’으로, 서지학적 가치는 물론 사상사 연구에서도 결정적 의미를 지닌다. 실학이 추상적 사변에 머물지 않고 실제 제도 개혁의 대안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실증적 증거라 할 수 있다.

불교 분야의 지정 유산도 눈길을 끈다. 「구례 화엄사 벽암대사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불교 중흥을 이끈 벽암 각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당대의 최고 문인과 서예가, 장인이 참여한 종합 예술품으로, 비문 내용과 서체, 조각 기법이 모두 조선 중후기 불교계의 위상을 증명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전적 「대혜보각선사서」는 고려 말 중국에서 전래된 선종 교학 자료의 희귀 판본으로, 조선 불교 승려들의 실제 수행과 사상 교류를 보여주는 발문이 실려 있어 학술적 희소성이 높다.

 

 

조각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합천 해인사 금동관음·지장보살좌상 및 복장유물」은 고려 후기 불교 조각의 대표작이다. 관음과 지장이 나란히 좌상으로 조성된 사례는 조각사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다. 내부에서 발견된 복장유물은 불교 의례와 공예기술의 정수를 집약한 자료로, 종교적 신앙과 물질문화가 맞닿은 지점을 보여준다. 「창원 성주사 석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은 모두 31구의 존상이 원위치에서 전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불석으로 제작된 이 대규모 명부조각군은 17세기 불교 조각사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주는 ‘완전체’라 할 만하다.

의학사에서는 허준의 「벽역신방」이 새롭게 보물로 지정됐다. 광해군 대 성행한 전염병에 대응하기 위해 편찬된 이 의서에는 성홍열로 추정되는 감염병에 대한 최초의 관찰과 치료법이 기록돼 있다. 이는 조선 사회가 집단적 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주는 사회사적 자료이자, 동아시아 의학사의 맥락 속에서 조선 의학의 독창성을 입증하는 문헌이다. 더욱이 이 책이 당시 임금이 아닌 개인에게 하사된 사실은 국가 차원의 공적 대응과 민간 차원의 의학적 노력 사이의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공예와 불교 공예사 분야에서도 중요한 유산이 보물 목록에 올랐다. 「강화 전등사 명경대」는 사자형 대좌 위에 거울을 얹은 독창적 구조로, 17세기 목공예의 창의성을 잘 보여준다. 거울 받침대 내부에는 제작 시기와 장인을 기록한 묵서가 남아 있어, 특정 장인의 작품 세계를 추적할 수 있는 드문 자료다. 「삼척 흥전리사지 출토 청동정병」은 통일신라의 고위 사찰에서 출토된 정병으로, 출토지가 명확히 기록돼 있고 보존 상태가 완전하다. 불교 의례용 도구인 정병은 승관제 연구와 더불어 신라 불교문화의 생활사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열쇠다.

국가유산청은 이번 보물 지정을 단순한 보호 차원을 넘어, 연구와 활용의 장으로 확장하겠다고 밝혔다. 각 유산은 실학과 불교, 의학, 공예, 조각을 아우르며, 한국사에서 정치·사회·종교·과학이 교차하던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들은 과거의 기록물이자 현재와 미래를 잇는 자산으로, 우리가 잊고 있던 시대의 지혜와 예술적 영감을 오늘에 되살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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