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529억 원. 그 돈은 누가 가져갔을까.
연간 529억 원의 충전금이 아무런 통지 없이 증발한다. 사용자는 기억조차 못한 채, 돈은 법적으로 유효기간을 다해 ‘소멸’된다.
사용자가 충전한 선불형 페이·머니·교통카드 잔액이 약관 한 줄 없이 사라지고, 기업은 이를 고지할 의무조차 없었던 구조.
지난 4년간 이렇게 소멸된 잔액은 총 2,116억 원. 그 누구도 알리지 않았다.

이제는 달라진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제시한 ‘선불전자지급수단 이용자 권익 보호방안’이 본격 시행되면,
소멸시효가 다가올 때 반드시 3회 이상 고지를 해야 하고, 잔액 소멸 예정일을 이메일·문자 등을 통해 사전에 통지해야 한다.
또한, 선불전자지급수단 약관에는 ‘소멸시효 존재’를 굵은 글씨로 명시하고, 실물 카드에는 시효정보를 시각적으로 강조하게 된다.

교통카드, 배달앱, 쇼핑페이, 문화상품권까지. 모두 선불전자지급수단이다.
소비자가 미리 충전하고 나중에 쓰는 구조지만, 문제는 ‘안 쓰면 사라진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는 사용자에게 알릴 책임이 없었다.
심지어 표준약관, 상품설명서, 앱 화면 어디에도 시효 관련 안내가 없어, 소비자는 잔액이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권익위가 실시한 국민참여 플랫폼 ‘국민생각함’ 설문에서도 이런 인식 격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전체 응답자 3,315명 중 64%가 ‘선불충전금에 소멸시효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답했다.
알려주지도 않았고, 사용자도 인식하지 못한 채, 내 돈은 타인의 수입으로 전환됐다.

사용자 입장에서 ‘안 쓴 내 잘못’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제도의 불균형은 구조적이다.
법적으로는 5년의 소멸시효가 적용되며, 사용자가 이 기간 동안 거래를 하지 않으면 잔액은 기업에 귀속된다.
이는 일부 전자지급 수단 사업자들이 별도의 수익항목으로 관리하고 있는 현실로 이어진다.

권익위는 이러한 사각지대를 보완하기 위해 세부 권고안을 함께 내놓았다.
첫째, 소멸시효 1년 전부터 3회 이상 사용자에게 통지해야 하며,
둘째, 약관과 요약설명서, 실물카드에 소멸 관련 정보를 의무 기재하도록 했다.
셋째, 소멸된 잔액이 어디에 쓰이는지 주기적으로 공개하고, 공익 목적 기금으로 환원하는 체계를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공익적 활용’은 이번 방안의 중요한 축이다.
권익위는 소멸잔액이 사업자 수익으로만 귀속되는 대신, 해당 금액을 사회복지, 교육기금, 지역공헌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예컨대, ‘잠자는 잔액기금’을 조성하여 장학금·긴급생계비·디지털취약계층 지원 등에 활용하는 방식이 검토된다.
이는 유럽 일부 국가의 잔액 환원 사례를 벤치마킹한 시도이기도 하다.

 

 

이제는 소비자도 준비해야 한다. 내가 가진 충전형 결제수단 중에 ‘사용하지 않고 있는 잔액’이 있는지,
등록된 이메일과 전화번호가 최신인지, 고지 동의 여부를 체크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일회성 결제가 아닌 이상, ‘내 돈을 지키는 루틴’이 필요해졌다.

선불충전금은 편리하다. 그러나 침묵 속에 사라진다면 그건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권리의 후퇴다.
고지 없는 소멸은 이제 막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의 ‘알 권리’와 ‘지킬 권리’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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