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약값만 수십만 원. 병원은 안 가더라도 약은 끊을 수 없어 ‘통원’ 진료만 반복되는 만성질환자들에겐 실손보험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실손보험이 병원 치료에는 든든하지만, 정작 매달 반복되는 약값은 보장 한도 안에 묶여 있어 보장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 제동을 건 건 다름 아닌 국민권익위원회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최근 ‘실손보험 장기 처방조제비 실질적 보상 방안’을 금융당국에 공식 권고했다. 실손보험이 만성질환자와 장기약 복용 환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권익위는 특히 건강보험의 급여 대상인 질환에 대해 ‘30일 초과’ 장기 처방 약값을 별도로 실손보험이 보장하도록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현재 실손보험은 외래 통원 진료 시 하루 한도(10만~30만 원) 내에서 진료비와 약값을 한꺼번에 묶어 처리한다. 이 한도 내에서 진료, 검사, 주사, 약값 등이 모두 포함되다 보니, 진료만 받아도 한도가 소진돼 약값은 사실상 본인 부담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입원치료 시에는 연간 5천만 원 한도로 약값까지 넉넉하게 보장된다. 이 같은 구조는 꾸준한 약물 치료가 생명줄인 만성질환자에게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권익위는 현재 다수 보험사가 판매 중인 ‘노후·유병력자 전용 실손보험’에 대해서도 관리 감독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이 상품들은 일반 실손보다 보험료는 높으면서도, 정작 가장 필요한 ‘약값’은 보장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고혈압, 당뇨처럼 매달 약값이 드는 질병을 가진 노인이나 유병력자들은 실질적으로 ‘보장받는 혜택’ 없이 보험료만 내는 셈이다.
특히 유병력자 실손보험은 표준약관조차 없어 보험사 자율에 맡겨져 있다. 권익위는 이에 대해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설계 기준과 표준약관을 명확히 정하고, 유병력자 실손보험에도 통원 약값 보장을 신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약값이 빠진 실손보험은 ‘실손’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국민권익위 유철환 위원장은 “영양주사 같은 비급여 진료의 남용은 제한하되, 생존에 필수적인 약값은 반드시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권고안은 실손보험의 형평성과 실효성을 바로잡는 첫 걸음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실손보험은 현재 약 3,900만 명이 가입한 ‘국민보험’이다. 이 보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피해자는 결국 일반 국민이다. 진정 국민을 위한 보험이라면, 병원에 입원해야만 보장받는 구조는 바뀌어야 한다. 약을 끊지 못하는 수많은 국민에게 필요한 건 수술비가 아닌 ‘약값’일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