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이야기 그 두번째


“선생님, 저 약속 지켰어요” 2012년 어느 날, 카톡이 들어왔다. 사진에는 점수가 적힌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등수는 1등. 2009년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여학생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반에서 1등을 하고 나에게 소식을 전한 것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만난 경민(가명)이는 단칸방에서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사춘기 소녀에게는 엄마와 단 둘이 산다는 것도, 자기 방이 없다는 것도 많이 속상한 일이었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지만 성적은 중상위권 이상으로 오르지 않았다. 경민이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인문계 대신 실업계를 선택했다. 그리고 나와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실업계로 가는 대신 1등을 하기로.
2010년 6월 월세보증금을 지원하여 경민이에게 자기 방을 만들어 주었다. 그 해 연말에 내가 다른 근무지로 발령이 나면서 경민이네와 나의 인연은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기특하게도 경민이는 나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 약속을 지켰다. 경민이는 그 후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고,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잘 살고 있다.

많은 어려운 아이들이 인문계 대신 실업계(특성화고)를 선택하면서 하는 다짐이 내신 관리 잘 해서 대학에 가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켜내는 아이들은 많지 않다. 사회복지 현장에서 13년간 근무하면서 아동 사례를 담당하지 않았던 2년을 제외하고, 11년 동안 고등학교 3학년들을 지켜봤다. 과거에 비해 전형도 다양해지고 기회도 많아져서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가정형편 탓에 아주 어렸을 때부터 대학 진학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2008년 내가 근무하던 복지관에 할머니와 함께 초등학교 5학년 여자 아이 한 명이 찾아와 상담을 진행했다. 장래희망을 묻는 나의 질문에 고등학교 졸업 후 간호조무사가 될 거라고 할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나는 반문했다. 왜 초등학생 손녀의 장래희망을 할머니가 결정하는지.
그 후로 할머니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고 내가 근무지를 옮긴 후에도 가끔씩 전화를 걸어 아이들 문제를 상의하곤 했다. 나중에 할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대학 진학을 반대하는 아버지 앞에서 윤경(가명)이가 대학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기어코 대학에 갔다고 한다. 윤경이가 대학을 무사히 마쳤는지, 본인이 원하던 꿈을 이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결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입시제도는 과거에 비해 기회가 많다. 4년제 수시 6회, 정시 3회, 그리고 전문대학은 입시 일정만 겹치지 않으면 여러 곳에 지원이 가능하다. 그러나 많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아이들에게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첫 번째로 4년제만 최대 9회인 지원의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 원서접수와 면접에도 많은 비용이 들고 예치금 마련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을 벗어난 학교를 지원하는 데 어려운 점이 많다. 통학비용이나 기숙사비용, 자취비용 등을 감당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제대로 된 정보와 입시전략을 제공 받지 못한다.

2010년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을 가진 소년소녀가정 아이가 있었다. 은지(가명)는 영어에 관심이 많고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은 아이였다. 나는 은지에게 천안에 소재한 4년제 대학 영문과에 지원할 것을 권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은지에게서 들려 온 대답은 의외였다. 담임선생님이 네가 어떻게 4년제 대학을 가냐며 원서를 안 써준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은지는 대학에 합격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일은 은지가 대학에 입학한 후에 일어났다. 2011년 3월의 어느 날, 은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희 학교 전교 1등 저랑 같은 학교 왔어요” 아마도 전교 1등 아이가 최상위권 학교를 고집하다 수능 최저기준을 맞추지 못하고 수능 점수에 맞춰 정시로 왔던 모양이다. 전교 1등 아이는 재수를 하겠다며 자퇴를 했다고 했고, 은지는 연극영화과로 전과를 하여 연극을 하고 있다. 몇 년 전에는 공중파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한 영상을 보내오기도 했다.
대학이 인생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갈 수 있다면 가야하는 곳이... 보낼 수 있다면 보내야 하는 곳이 대학이라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일수록 빨리 성인이 되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러나 갓 스무 살 아이들에게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탄탄하지 못한 아이들일수록 대학이라는 울타리가 더욱 필요하고 세상과 맞설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
2020년 12월 3일, 오늘은 2021학년도 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날이다. 해마다 다양한 사건사고가 발생하고 여러 가지 사연이 쏟아지는 날이다. 게다가 올해는 코로나라는 사상최대의 변수까지 있다. 아무쪼록 무탈하게 시험이 끝나고 49만 명 수험생 모두가 후회없는 결과를 받아들 수 있기를 바란다.

선생님이 계셔서 늘 든든하고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