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찾아 가는 길 - 양평 두물머리~남양주 다산유적지
다산 찾아 가는 길
- 양평 두물머리~다산유적지
양수역에서 걸어가는 두물머리는 꽃길입니다. 물 위에는 하얀 연꽃과 연분홍 연꽃이 평화롭게 뱃놀이 하고, 길가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지천으로 피었습니다. 이 후덥지근한 날씨에 꽃이 있으니 그나마 지루함을 잊고 걸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겨우 조금 밖에 걷지 않았는데도 벌써 땀이 흐르는데, 꽃마저 없으면 얼마나 힘들겠나.
세미원과 연결된 배다리 앞에 이르러 연꽃 핫도그로 허기를 때우고 걸어갑니다. 다행히 날씨는 더워도 맑아서 좋습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을 달려온 두 물줄기가 만난 팔당호는 기운이 넘칩니다. 이미 사람들은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펴고 휴일의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습니다.
이곳저곳 몇몇이 모여 두물경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림 동호회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쉬었다 갈 겸 그들 옆에 서성거리며 그들이 그리는 그림을 따라갑니다. 풍경을 멋지게 그려내는 솜씨가 경이롭고, 그 재주가 부럽기만 합니다. 나는 그들 중 나보다 몇 살은 더 들어 보이는 남자를 바라보며 그림을 참 잘 그린다며 말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빙긋이 웃으며 그림을 배운지 1년도 안 되었다고 합니다.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우연히 그림 동호회에 가입하여 취미로 배웠다고 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초보답지 않아 보였는데 말입니다. 그럼 왕초보인 나도 1년 쯤 그림을 배우면 이 정도를 그려낼 수 있으려나?
자리를 뜨면서 그들이 그리는 두물경 풍경을 스마트폰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눈으로 볼 때는 그리 멋진 풍경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사진으로 찍고 보니 훨씬 멋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괜히 여기서 이 풍경을 그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거나, 나보다 더 잘 볼 수 있거나,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음이 틀림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지만 보는 능력은 천차만별인 것 같습니다. 거기에 마음의 눈까지 더하면 같은 눈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합니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보는 눈이 각기 다르니 서로 다르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내가 본 것만이 유일한 사실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조금 거북하고 불편해도 이 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는 곳이 이해와 소통의 시작점이 될 듯합니다.
한강의 정취를 즐기며 걷는 길은 잘 정돈되어 있고, 억새와 갈대가 어우러져 있습니다. 북한강철교를 건너 강물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조안면 능내리 연꽃마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연꽃은 팔당호에 안겨 연분홍 꽃내를 피우고 있습니다. 다산은 생가 뒤 산에서 팔당호가 그려낸 산수의 수묵화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 그는 이곳에서 1762년에 태어나 14세가 되어 서울로 이사 가기 전까지 살았습니다.
실학박물관을 견학합니다. 다산은 1789년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헌부, 병조, 형조 등에서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 또한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를 준공하고, 1793년 수원 화성을 설계한 과학기술적 소양을 갖춘 관료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풍부한 이력과 학문적 다양성은 정치, 경제, 법률 등에 관한 해박한 저술의 기반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산의 저술 중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와 같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국방에 관한 저술도 있습니다. 그의 안보관은 민보방위론으로 집약할 수 있는데, 이 내용을 담은 저술이 '민보의'입니다. 그 핵심내용은 한마디로 민생 보장을 토대로 한 향촌 단위의 소규모 성곽, 보를 근거지로 하여 백성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방위전략입니다. 비록 그의 시대에 구현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지혜와 통찰력, 그리고 혜안은 넓고 깊어 그를 알아 가면 갈수록 깊은 감동을 받곤 한다. 내가 다산길을 자주 찾는 것도 이런 이유이기도 합니다.
팔당역으로 걸어가는 길은 노을로 돌아가는 해를 따라 가는 길입니다. 햇빛이 한강을 타고 금빛 물결 위를 서핑 하듯 날아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달려오는 것이 세월인가 봅니다. 다산은 1801년부터 1818년까지 18년 동안 객지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유배가 풀려서는 이곳으로 돌아와 18년을 더 살다가 1836년 영면했습니다. 한 시대의 지성이 떠나간 그의 생가 앞에는 그림처럼 팔당호가 펼쳐지고, 강물은 늘 푸르기만 합니다. 파란만장한 삶이었습니다. 유학을 공부하였지만 실질을 중시하여 관직에 있을 때는 기술 관료요 과학수사관이었고, 귀양 중에는 후세의 귀감이 되는 저서를 남겼습니다. 여러모로 어려운 이 시대에 다산을 만나고 싶은 것은, 그의 혜안과 지혜를 배우고 나누고 싶은 소망 때문일 것이다.
봉안터널 지나 연꽃마을 들어서니
팔당호는 연꽃을 담고
연꽃은 호수를 품었어라
솔솔 부는 바람에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물러서는
연분홍 연꽃 봉오리
볼 붉히며 눈 마중하네
잔뜩 흐린 날씨
후덥지근한 열기 만만치 않은데
그래도 가끔은
바람 불어와 콧등을 스쳐 가니
해맑은 가슴으로 다산 찾아 가보세
(졸시, 「두물머리에서」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