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낙도 선비의 고향, 남촌
남산 회현동 일대를 남촌, 가회동과 재동 등의 일대는 북촌 남산 선비들은 며칠 씩 끼니를 거르더라도 양반의 자존심과 체면을 지키며 학문 정진에는 여념이 없었다.
과거 남산 회현동 일대를 남촌이라 불렀고, 가회동과 재동 등의 일대는 북촌이라 했다. 청계천 아래와 위로 남촌과 북촌이 갈린 셈이다. 벼슬아치들이 살았던 북촌과 달리 남촌은 벼슬에 오르지 못해 궁핍한 선비들이 살았다. 남산 선비들은 며칠 씩 끼니를 거르더라도 양반의 자존심과 체면을 지키며 학문 정진에는 여념이 없었다. 허름한 옷에 떨어진 갓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맑은 날에도 나막신을 신었는데, 나막신 소리 때문에 '남산골 딸깍발이'라는 별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지금의 남산은 울퉁불퉁했던 비탈이 반듯한 돌이나 미끈한 나무 계단이 설치되었고 기능성 높은 등산화로 사뿐하게 다니지만, 청빈 낙도의 삶으로 얼룩진 딸깍발이 선비들은 남산을 오르내릴 때 딸깍거리는 둔탁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남촌 선비들을 떠올리면서 현실적인 보탬과 실리만을 따지는 물질 만능의 현대인들과 구태여 대보일 필요는 없더라도 그들 나름으로의 삶도 기억해주고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가팔랐던 내리막이 안정을 찾을 무렵 남산 끝자락에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하여 내로라하는 선현들의 동상이 남산을 빛내준다. 일제가 훼손했던 이 일대를 발굴한 결과 성곽 기저부가 원형에 가깝게 드러냈다. 일부 구간에 발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줌과 동시에 유구와 함께 태조, 세종, 숙종 이후 각각의 도성 축성 기법과 돌의 변천을 알아보도록 양옆을 통풍이 잘 되게 열어놓고 덮개를 두른 전시장을 마련해 났다.
전시장 아래 백범광장 일원은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있던 곳으로 식민지배의 상징을 항일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념물로 대체하였다. 주변 일대의 한양도성은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철저히 파괴하고 땅 속에 묻혔는데, 최근에 다시 복원하면서 주변을 쾌적하게 공원화하였다. 성곽 훼손이 심하여 회복이 곤란한 데는 바닥에 도성 자리라는 흔적으로 대신해 놓았다.
백범광장부터 복원된 성곽은 이어짐과 단절을 반복하다가 기약 없이 도시의 역사 속으로 숨어버렸고, 도성이 사라지는 안타까운 모습을 타들어 가는 심정으로 속절없이 지켜봤을 숭례문崇禮門의 속칭인 남대문만 서울 한복판에 서 있다. 일과를 마친 오늘의 남대문은 어스름한 빛에 잠긴 채 성문을 굳게 잠가놓고 한양도성 스탬프 투어 인증함만 열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