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의 오솔길에서 향기를 담다
애국가의 한 소절을 담은 ‘철갑을 두른 듯한’ 소나무는 남산의 존재와 가치가 시공을 초월하여 끝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남산공원은 서울에서 가장 넓은 공원이며 1910년 최초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남산공원은 서울 도심에서 시민들에게 맑은 공기를 제공하는 자연 휴식처이자 다양한 활동을 열어주는 여가와 생활의 공간이다. 애국가의 한 소절을 담은 ‘철갑을 두른 듯한’ 소나무는 남산의 존재와 가치가 시공을 초월하여 끝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남산공원길 입구에서 좌측으로 두 번을 틀고 몇 걸음 더 가면 서울시 중구와 용산구 갈림길에서 끊겼던 성곽이 산등성이 끝자락에서 머리를 내민다. 고개를 곧추세운 성곽을 따라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탄다. 흑갈색 성벽이 숲을 가르며 꼭대기를 향해 구불구불하게 높은 장벽을 쳤다. 목제 데크가 그 옆에서 줄을 대고 장벽을 따라 하듯 나란히 한다.
오랜 세월을 성벽으로 살아가기에 지친 장벽은 일부 구간에서는 풍화되어 균열이 생기고 배부르게 튀어나오며 아프다 한다. 그래서 사람으로 치면 종합건강검진을 받듯, 성벽의 상태를 알아봐서 손을 보기 위해 전문 기기로 계측 중에 있다. 축성 당시 상황을 기록한 각자성석에 새긴 글자가 바람과 햇빛, 공기와 어울리는 동안 세월에 지쳐 어슴푸레하게 닳고 닳았다.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며 신비스러움에 빠지고, 잠시 산객으로 돌아가 산을 보듬어 내 안에 들어놓는다. 길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깊은숨을 몰아쉰다. 내뿜는 이산화탄소는 저녁을 향해 치닫는 햇살과 함께 탄소동화작용을 거쳐 숲에 양분으로 제공하고 숲은 인간에게 신선한 산소로 보답한다. 이렇듯 인간과 숲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하루가 다르게 물 오른 흙 향기와 일렁이는 산 내음으로 호사를 누린다.
성곽을 구성하는 돌들이 다른 구간에 비해 잔돌과의 조합이 두드러졌다. 축성 당시 가까운 곳에 마땅한 석재원이 없거나 비탈진 이곳까지 운반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지형 조건이다. 이런저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도성 밖을 빙 두른 성곽은 어렵게 쌓은 만큼 가치가 인정되고 시간이 켜켜이 쌓일수록 진가를 발휘한다.
데크로 된 육교로 월담하여 꼭대기에 이르면 평평한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발아래로 성곽이 산등성이를 휘감으며 늘어졌다. 옥개석屋蓋石을 오랫동안 성곽 등에 짊어지느라 부대꼈는지 옥개석은 사라지고 콘크리트가 얹어있다. 불안정한 작은 돌을 틀어막기 위해 궁한 나머지 짜낸 계책으로 보이지만 허접하고 민망하기 그지없다. 전통을 살리고 경관을 고려하여 내구성 높은 공법으로 처리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쉽게 떨구지 못한다.
도성을 떼어놓고 숲을 가로지른 산길로 접어든다. 적당한 만큼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내준다. 우거진 신록을 꿈꾸는 떡갈나무는 헐벗은 군락을 이루며 헐렁헐렁한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속살 풍경 하나를 뚝딱 그려낸다. 울창한 한여름에는 절대로 그려낼 수 없는 이 시절에만 만들어낸 계절 밥상 같은 것이다. 자연은 특정 계절만을 편애하지 않고 시시각각 개성 있는 감동을 연출해 준다.
한적한 숲 속에서 마냥 쏟아져 나온 여린 봄 향기를 마음껏 주어 담는다. 봄을 재촉하며 우짖는 산새 소리는 덤이다. 오솔길로 접어든다. 자연에 더 집중되고 어느 것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런 길을 더 걸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미련이 남는다면 다음 계절에 새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을 기약하면 그만이다. 남산 허리를 굵게 휘감은 순환도로에 익숙한 사람에게 숲 안에 꼭꼭 숨겨놓은 은둔의 길은 전혀 다른 세상이라 하겠다.
입구에서 갈라섰던 남산순환도로와 해후한다. 사람과 차량으로 뒤엉킨 순환도로는 넓은 폭만큼 소리로 한가득 찼다. 우리끼리 누렸던 남산이 언제부터인지 서울의 외국 관광객들에게 단골 코스가 되었다. 남산에 오면 늘 느끼는 게 있다. 걸어 올라오면 쾌적한 길을 구태여 고집을 부려가며 자동차를 이용하는 꼬락서니는 매캐한 매연을 풍겨 소음을 유발하고 공기의 질을 떨어트린다. 외국인 전용 관광버스마저도 사람은 내려서 걷게 하고, 굳이 차량만을 우긴다면 친환경 전기차를 의무화해야겠다.
도시가 지치고 남산이 몸살을 앓으면서 소나무에 솔방울이 많이 열린다고 한다. 환경이 오염되면 나무들은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성장 대신 DNA 보존에만 충실한다는데, 소나무는 종족 번식용 솔방울만을 지나치게 많이 열리게 하여 서서히 도태될 수 있다는 얘기도 생겨났다. 철갑을 두른 듯한 남산의 소나무가 사시사철 생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만은 아닐 것이다.
팔각정휴게소 정류장의 북새통 행색은 일상이 되었다. 다국적 사람들과 함께 걸어서 세계 속으로 들어온 듯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성곽의 실체가 다시 살아나 끼어들며 발길을 따라붙는다. 관광객 틈바구니에서 머리를 높이 쳐든 가파른 오르막으로 고도를 높여간다. 서울의 랜드마크이자 관광 명소인 남산서울타워가 꼭대기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서 있다.
정상에 터를 잡은 남산팔각정은 조선 시대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이다. 제1공화국 때 이 자리에 이승만 대통령을 기린 '우남정'으로 지었다가 사월혁명 이후 지금의 팔각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남산팔각정은 새해 일출 맞이 장소로 많이 찾는 곳이다. 문재인 대통령까지도 새해 첫날 일출을 보러 청와대 측근들과 깜짝 다녀갔다고 한다.
팔각정과 이웃하는 목멱산봉수대도 사람들의 눈길이 잦은 곳이다. 봉수대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변방의 경보警報를 중앙에 알리는 일종의 통신수단이다. 봉수대는 청구도靑邱圖등의 고증을 거쳐 복원하였다. 함경도, 경상도, 평안도, 전라도 등의 상황을 중앙에 집결한 만큼 다른 데 비해 다섯 봉수대이며 경봉수라고도 한다.
좌우로 500년 터울의 한양도성과 남산케이블카가 같은 시대에 공존하는 계단 따라 하산이다. 길가에서 한 발짝 물러난 곳에 전망대로 내준 누에 모양의 잠두봉 포토아일랜드이다. 돌출된 난간대를 부여잡고 고개만 돌리면 내사산內四山으로 둘러싸인 다채로운 풍경이 배경 사진으로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잠두봉 발치로 어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던 회현동會賢洞에 시선이 주목되고 생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