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손의 아픔과 복원의 과제 - 흥인지문

긴 잠에서 깨어난 도시와 패션의 만남

2022-09-29     김무홍

 

흥인지문 야경 / 한양도성 제공

 

한양도성과 단절된 채 도시의 섬처럼 도로변에 우뚝 자리 잡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속칭인 동대문이 여정의 어귀로 내어준다. 동대문은 도성이 축조된 초기부터 4대문의 동쪽에 있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한양도성은 사람의 도리를 중시하는 인····의 오상五常의 이념에 따라 동쪽의 동대문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는데, 풍수지리설에 따라 동쪽의 낙산 지세가 약해 산맥을 뜻하는 지를 넣어 기운을 보완하였다. 그래서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네 글자의 현판을 갖게 되었다.

 

흥인지문 / 한양도성 제공

 

동대문은 남대문과 같이 홍예虹蜺의 석축 기단 위에 2층 문루門樓를 두었다. 반면에 남대문의 조선 초기 건축 양식과 달리 동대문은 조선 후기를 대표한다. 성문 앞에는 적의 접근을 차단할 목적으로 반원 모양으로 빙 둘러친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한양도성의 8개 성문은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유일한 구조이다.

1899년 돈의문과 청량리 간을 관통하며 최초로 전차가 개통되면서 본격적으로 도성이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이는 성문의 기능 축소는 물론 한양의 전통문화마저 점차 서구화되어갔다. 1907년 일본 왕세자 방문에 맞추어 숭례문 양옆 성벽을 헐어 길을 넓혔다. 소의문은 1914년에 제거되고, 1915년 돈의문은 건축재로 매각되었다. 혜화문은 1928년에 문루가, 1938년에 성문과 성벽 일부가 헐렸다. 일제는 1925년 남산에 조선신궁과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을 지을 때도 성벽을 헐고 성 돌을 빼갔다. 민간에서도 성벽 주변으로 집을 지으며 훼손에 가세하였다.

 

흥인지문 / 한양도성 제공

 

광복 이후마저 도로, 공공건물 등을 지으며 성벽 훼손이 멈추지 않았다. 한양도성은 현재 70%가 남아있거나 중건되었다 한다. 숙정문, 광희문과 혜화문만 원형에 가깝게 중건하였다. 나머지 형체가 사라진 돈의문과 소의문은 제자리에 제모습을 찾아주기 위한 지혜 모으기가 절실하다. 축성 기술 등 무형의 자산을 제대로 발굴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여야겠다.

동대문에서 광희문으로 이어지는 도성과 청계천이 맞닿는 곳에 물줄기가 원활하게 빠지도록 5개 홍예교를 설치한 다음 그 위에 한양도성을 축조하였다. 이 홍예는 수문이 다섯 칸이라는 데서 오간수문五間水門으로 불렸는데, 지금은 오간수문지 위에 설치된 교량을 오간수교 또는 오간수다리로 불린다. 오간수문은 상당 부분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오간수문의 하부 사질토 지반에 직경 10cm 내외 나무 말뚝을 조밀하게 박아서 기초를 형성한 점은 의미 깊은 공학적 착안이다.

 

흥인지문 / 한양도성 제공

 

2005년 청계천 복원사업 과정에서 10여 개의 다리 흔적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일부 또는 전체가 남아 있는 광통교와 수표교 빼고 모두 철거됐다. 청계천은 단순한 하천 복원을 떠나 역사와 문화의 복원이자 생명 복원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의 많은 관심으로 청계천이 복원됨으로써 산업화에 소외되었던 사람 중심의 생활환경이 쾌적하게 개선하였고, 서울시의 이미지 경쟁력을 높였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사업이 급조하여 추진하는 바람에 생태적 다양성이 부족하고 훼손된 문화유산의 복원 문제가 과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