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없이 드러난 한양도성의 으뜸 절경, 백악마루

높이 342m로 내사산 중 가장 높은 북악산 정상, 백악마루 아래로 넓게 서울의 지붕이 펼쳐진다.

2022-09-01     김무홍

 

최근 조선 시대의 창덕궁을 제외한 나머지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의 네 곳 궁궐을 한데 묶어서 한양도성과 함께 일괄하여서 일건一件으로 세계문화유산에 재신청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알려져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이제는 앞선 실패를 거울삼아 더 면밀하고 충분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비록 한양도성만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실패하였으나 당시 현장을 찾은 패널들이 백악 구간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극찬을 아끼지 않다고 한다. 한양도성 전 구간에서 으뜸가는 절경이라 할 만큼 조선왕조 진산의 품에 안긴 백악 구간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났다고 하겠다.

 

백악마루 / 한양도성 제공

 

고된 대가를 치르고 오르면 백악쉼터가 아늑한 자리를 마련하고 탐방객들을 불러들인다. 백악쉼터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실로 장관이다. 인왕산 자락을 휘감고 창의문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한양도성의 헌걸찬 위용이 가슴 벅차게 펼쳐진다. 순성길 가까이에서 미처 보지 못한 한양도성의 실체가 통째로 드러내며 베일이 벗겨진 셈이다. 거친 숨을 진정시키며 백악산과 인왕산에 걸쳐 번쩍이는 한양도성의 눈부신 모습을 편히 감상한다. 그늘이 드리운 쉼터 지붕 안에서 솔솔 부는 산들바람을 맞으면서 북한산의 족두리봉, 향로봉, 비봉, 사모바위, 승가봉, 문수봉, 보현봉, 형제봉 순으로 이어지는 풍경 따라잡기가 바쁘다. 지금 당장 백악마루의 진가를 물은 다면 초록 숲속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한양도성의 정체인데, 이제 몇 번의 달을 거듭 보내고 새 계절이 오면 또 다른 백악의 참모습으로 갈아타서 탐방객들을 유혹하리라.

 

 

길섶에서 나란히 따라붙은 성곽이 손을 내밀어 동반자가 되어준다. 성곽 사이사이에 일정하게 뚫린 틈새로 쉼 없이 실려 온 계절의 향기에서 신선하고 상큼함이 묻어난다. 계절의 향기는 그때그때 늘 새롭다고 하겠다. 지난봄 가지가 휘어지도록 알알이 박힌 아카시아꽃 향이 그랬듯이 올겨울 은세계가 펼쳐지면 설산에서 실려 오는 시린 내음도 은근히 기다려진다.

구간에 따라서 옛 돌과 새 돌이 화합을 이루며 시대별 변천을 보여준다. 문화재 관련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조그만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비로소 전문가다운 식견이 생기기 마련이다. 여기에다 문화재에 관한 관심을 기울인다면 우리의 소중한 문화 유물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높이 342m로 내사산 중 가장 높은 북악산 정상이다. 백악마루(한양도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처음 도성을 쌓을 때 공사 구간을 97개로 나눴는데 각 구간의 이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붙였으니 시작 구간은 천, 끝나는 구간은 조였다. 이곳 백악마루가 바로 천구간에 해당한다.) 아래로 넓게 서울의 지붕이 펼쳐진다. 경복궁 뒤쪽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조선왕조의 진산인 북악산은 백악白岳, 면악面岳, 공극산拱極山으로도 불렸다. 북악산은 멀리서 바라보면 유난히 우뚝하여 눈에 잘 띄었다. 그 모습이 탐스러운 죽순처럼 솟아오른 산봉우리나, 만개하는 모란 봉우리처럼 비쳤다고 한다.

조선의 도읍지 한양은 수량이 풍부한 한강을 끼고 있어 수운이 발달한 물류의 거점이었다. 한강 유역의 비옥한 옥토는 국부를 창출하는 중심 노른자인 까닭에 고대 시대부터 주변국들끼리 호시탐탐 뺏고 뺏겼던 쟁탈의 현장이었다. 그래서 잦은 외침에 시달리는 동안 민심을 든든하게 지켜준 것이 바로 이곳 백악산을 주축으로 하는 산세였고 성곽이었다. 지금의 성곽은 시대를 거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보완하며 조선왕조의 찬란한 한양도성으로 빛날 수 있었다.

 

소나무에 남겨진 총탄 흔적

 

청운대로 내려가는 길목에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는 200년 수령의 소나무가 역사의 산증인으로 자초한다. 1968년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는 과정에서 우리 군경과 치열하게 교전한 흔적이다. 사건 당시 유일하게 김신조만 생포되고 나머지는 모두 사살되었다는 정부 발표와 달리 한 명이 북으로 도주하였고 그는 나중에 조선인민군 대장까지 오른 박재경으로 밝혀졌다. 사건 발생 후 반세기가 훌쩍 흘렀지만. 역사적 사건을 일깨우고자 총탄 자국에 붉은색과 흰색 페인트 색칠로 선명하게 상기시켜 놓아 누구라도 그때의 실상을 알 수 있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