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생제, 20세기 의학의 승자

20세기 항생제가 들어오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시행되던 전통의학은 모두 감염병에 속수무책이었다. 항생제 개발은 미생물에 감염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게 해준 일이다. 수많은 연구자의 영광과 경쟁과 시기 질투와 음모와 갈등과 돈이 얽힌 장편 드라마다. 코로나-19에서 보듯이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는 약은 아직 많지 않아 많은 사상자를 낼 수밖에 없어 보인다. 더 강력한 과학의 힘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2020-09-28     김성수

 

요즘 코로나-19 바이러스 공격으로 지구촌이 쑥대밭이 되고 있다. 빨리 인류가 이 전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데 인류는 100여 년 전에야 세균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코로나-19에서 보듯이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는 약은 아직 일부만 개발되어 있어 앞으로도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인류는 많은 사상자를 낼 수밖에 없어 보인다. 불길하지만 현재로서는 속수무책인 것 같다. 더 강력한 과학의 힘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인생

 

라이너 마리아 릴케

(류시화 옮김)

 

인생을 꼭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하루하루를 일어나는 그대로 맞이하라

길을 걷는 아이가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들의 선물을 받아들이듯

 

아이는 꽃잎을 모아 간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머리카락에 행복하게 머문 꽃잎들을

가볍게 떼어 내고

아름다운 젊은 시절을 맞이하며

새로운 꽃잎으로 손을 내밀 뿐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20세기 최고의 독일어권 시인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작가이다. 장미 가시에 찔려 폐렴이나 파상풍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백혈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릴케가 살던 때는 아직 페니실린이 개발되기 전이라 세균으로 죽는다면 서정시인인 그에게 어울리는 낭만적이라고 생각하여 사람들이 일부러 그렇게 미화했다고 고등학교 시절에 시인 황금찬 선생님께 배운 것 같다. 토마스 만의 장편소설 마의 산은 스위스 알프스산맥에 있는 결핵 수용소에 이런저런 환자들이 모여 살며 일어나는 이야기인데 나는 노벨상 수상 작가이고 이 소설에 대한 평이 좋아 끝까지 인내력을 가지고 읽었지만 잘 이해하지 못해 내 서재에 아직도 미완성 숙제로 남아있다. 프랑스의 너무나 유명한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그나마 읽었지만 페스트는 몇 번 시도하다 포기한 소설이다. 14세기 유럽에서는 페스트로 인구의 약 반이 사망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조선의 뛰어난 두 왕, 세조와 정조가 종기를 치료하지 못하여 사망했다는 일은 매우 안타깝다. 특히 정조는 수은 증기를 쐬는 연훈방(煙熏方)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정조가 종기로 죽지 않고 좀 더 살아 조선을 다스렸으면 일본이 조선을 그렇게 쉽게 먹지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정조가 매우 뛰어난 왕이었다고 하고, 당대 훌륭한 학자 관료들도 많았으니 정조를 죽인 종기와 그것을 치료하지 못한 한의사들이 매우 원망스럽다.

한의학에서는 1980년도 초까지도 수은 증기로 매독을 치료한 듯하다. 경희대 내과 세미나가 끝난 후 당시 내과 과장 최영길 교수가 참석한 경희대 한의대 교수에게 질문했는데 그 교수가 그렇게 답했다. 그 답을 듣고 함께 세미나에 참석하였던 모든 의료진이 놀라 웅성거리던 모습이 생각난다. 지금이야 한의사들도 수은 같은 독약으로 감염병을 치료하는 일은 상식 이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당시까지는 그랬다. 그러니 한의사들이 도저히 낫지 않는 정조 종기 치료를 위해 수은 증기를 사용한 일은 그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의학만이 아니고 세계 곳곳에서 시행되던 전통의학은 모두 20세기 항생제가 들어오기까지 감염병에 속수무책이었다.

이상은 비운의 천재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일 강제합방 해인 1910년에 태어나 27년을 살다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한하운 시인은 함경남도 부유한 선비의 장남으로 태어나 중국 베이징 대학 농업 학과를 졸업한 지성인이었으나 한센병(나병)에 걸려 한 많은 생을 살다 갔다. 한하운의 보리피리는 꽤 유명한 시이다. 한센병 환자의 떨어진 손가락, 뭉그러진 코를 보면 저절로 공포감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1960년대 우리나라에는 많은 한센병 환자가 이곳저곳 다니며 구걸을 하였고, 때로는 주위 사람들을 위협까지 하였다.

이런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는 곳이 소록도이다. 한센병이 유전된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1990년대 전후까지 단종·낙태 등 강제 수술이 이어졌다고 하니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한센병에 대해 얼마나 공포감을 느끼는지 알 수 있다. 경희대 피부과 과장께서 1980년대 초까지도 멀쩡하게 사회생활 하시는 많은 분이 한센병 치료 약을 가족도 모르게 복용하며 치료받는다고 하시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한센병이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감염될 수 있었던 것이 우리나라 현실이었다.

병원균 때문에 인류가 고생한 일은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니 당연히 의사나 의학에 관심 있던 사람들은 병원균을 박멸하여 인류를 병으로부터 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을 것이다.

 

소독과 청결

모르몬교가 우리나라에서는 이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선입견에 젖어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본부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는 모습을 처음 본 순간 나는 무척 놀랐다. 그리고 우리나라 젊은 여대생이 학교를 휴학하고 자원봉사하고 있던 모습에 또 놀랐다. 모르몬교가 어찌 여겨지든 의학적으로는 모르몬교 창시자인 스미스 (Joseph Smith)술은 위장을 위함이 아니라, 너의 상처를 씻기 위함이다라고 하며 상처에 알코올 소독을 권장하였다고 그들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이 소독에 관한 공식적인 최초 기록이라고 한다.

 

홈즈 (Oliver Wendell Holmes Sr)

마취(anesthesia)라는 단어를 만든 미국 의사이자 작가인 홈즈(Oliver Wendell Holmes Sr)1843년 산욕열의 전염성(The Contagiousness of Puerperal Fever)이라는 논문을 통해 산욕열은 의사들이 이 환자에서 저 환자로 옮기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산욕열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부인과 의사들이 손이나 수술 도구를 철저히 소독해야 한다고도 주장하였다. 산욕열이 발생하면 해당 병원은 최소 6개월간 병원 문을 닫고 당시 사용했던 모든 수술복을 소각하여야 한다고 했다. 요즘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매일 듣는 말이다. 그런데 당시 미국 산부인과 권위자인 메이그스(Charles Delucena Meigs)의사들은 신사이고, 신사들 손은 깨끗하다고 젊잖게 홈스를 나무랐다고 한다. 지금은 메이그스가 얼마나 멍청한 말을 했는지 누구나 알 수 있다.

 

비극의 젬멜바이스 (Ignaz Philipp Semmelweis)

젬멜바이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헝가리 의사인데, 오스트리아 비엔나 제너럴 병원(Vienna General Hospital)에서 산부인과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이 병원은 제1, 2 산과 병동이 있었는데, 1병동은 산부인과 레지던트들이 수련을 받던 병원이고, 2병동은 주로 산파들이 교육을 받고 분만을 도왔다. 그런데 의사들만 근무하던 제1병동에 입원한 산부들의 사망률은 10%를 넘었는데, 산파들이 일하던 제2병동에서는 사망률이 4% 이하였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임산부들은 당연히 의사들이 근무하는 제1병동을 피하게 되었다. 일부 임산부들은 제1동에 입원하여 애를 낳느니 차라리 길바닥에서 애를 낳겠다고 악을 쓰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의사들 망신살 뻗친 것이다.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이 병원에서 조교수 (현재의 레지던트 말년 차)로 근무하고 있던 젬멜바이스는 부검 중 부검 칼에 찔려 조그만 상처를 입고 사망한 친구의 부검 결과가 산욕열로 죽은 환자들의 부검 결과와 같다는 것을 알아채고 제1병동에서 사망률이 높은 이유가 그곳의 산부인과 레지던트들이 부검한 후 손을 씻지 않고 분만에 참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젬멜바이스는 의사들이 분만하기 전 반드시 염소 처리된 석회수로 손을 씻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병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 제1병동의 의사들이 부검 시 손을 잘 씻자 사망률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1847년 말에는 젬멜바이스의 업적이 전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고, 1848년에는 젬멜바이스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 결과를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등 여러 유럽국가에서 발행되는 권위 있는 의학 학술지에 발표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 의학 학술지 편집자였던 피부과 의사 헤브라 (Ferdinand Ritter von Hebra)는 젬멜바이스가 종두법을 발견한 제너(Edward Jenner)에 비견될 정도로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고 공개적으로 칭찬하였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후로 젬멜바이스에게 불행이 닥친다. 첫 번째 불행은 당시 많은 의사가 여전히 네 가지 액체가 부조화를 일으키면 병이 발생한다는 히포크라테스와 갈렌의 학설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젬멜바이스의 주장을 무시하고 거부하거나 심지어는 조롱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의학 교과서마저도 환자는 다양한 원인에 의해 산욕열에 걸리니 의사들은 환자마다 다르게 치료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의학계의 거두 피르호(Rudolf Ludwig Carl Virchow)마저 젬멜바이스의 이론이 엉터리라고 비난하였으니, 당시 전 유럽의 의사들에게 젬멜바이스는 공공의 적이 된 것이다. 젬멜바이스도 이런 동료 선배 의사들을 살인자라고 몰아붙이기도 하였다고 하니,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세가 약한 젬멜바이스는 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 불행은 1848315일 젬멜바이스의 고국 헝가리에서 합스부르그가의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항하는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젬멜바이스가 정치적 시위에 참여했다는 증거가 없었으나 당시 산과 과장이었던 클라인(Johann Klein)은 임기가 끝나자 학장 로키탄스키(Baron Carl von Rokitansky)를 비롯한 여러 교수가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젬멜바이스를 해고하고 만다. 대신 그의 적이자 보수적인 오스트리아인 브라운(Carl Braun, 18221891)을 임명하였다.

세 번째 불행은 부다페스트 대학병원 산과 과장을 포함한 헝가리 의사들은 젬멜바이스 주장을 철저히 무시하였다는 것이다. 부다페스트 산과 과장이 죽자 헝가리 의사들은 젬멜바이스 대신 그의 영원한 적인 브라운을 과장으로 뽑고 만다.

네 번째 불행은 1857년 젬멜바이스는 19살 연하와 결혼한 것이다. 1861년 젬멜바이스는 그의 대작 산욕열의 원인, 개념, 그리고 예방 (Die Ätiologie, der Begriff und die Prophylaxis des Kindbettfiebers, The Etiology, Concept and Prophylaxis of Childbed Fever)을 출판하였으나, 동시대 사람들은 젬멜바이스를 철저히 무시하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그의 부인마저 젬멜바이스가 미쳤다고 믿고 1865년 정신병원에 보냈는데, 그는 단 2주 후 그곳에서 패혈증으로 죽었다.

정치적 기술도 소통능력도 전혀 없는 고집쟁이 젬멜바이스는 약소국 헝가리 출신이면서도 지배국 오스트리아에서 너무 일찍 성공하여 감당할 수 없는 동료들의 질시와 거부감을 불러일으켰고, 헝가리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겠다고 전쟁을 일으킨 당시 국제 정세마저 젬멜바이스를 몰락으로 이끌고 갔다. 약소국민들의 비애다.

 

파스퇴르 (Louis Pasteur)

1860-1864년 사이, 프랑스의 위대한 미생물학자 파스퇴르 (Louis Pasteur)부패에 관한 미생물 학설 germ theory of putrefaction)”을 연속적으로 발표하여 세균이 부패와 감염의 원인이라고 확실히 증명해 보였다. 파스퇴르는 파스퇴르 소독법을 만들어 우유를 한층 안전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광견병(rabies)과 탄저병(anthrax) 예방주사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특히 모든 세균은 무기물로부터 새로이 창조되는 것 (자연발생설)이 아니라 기존의 세균이 번성한 것이라는 학설을 주장하여 현대 미생물학을 확실히 정립하였다. 파스퇴르는 노벨상이 시상되기 전에 사망하여서 노벨상 수상자는 되지 못했지만 어떤 미생물학자보다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의 이름을 딴 파스퇴르 연구소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최고의 연구기관이 되어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 여러 지역에 설치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도 파스퇴르 연구소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파스퇴르에 의해 홈즈와 젬멜바이스의 산욕열에 대한 이론이 사실임이 분명히 밝혀졌다. 리스터 (Sir Joseph Lister)는 파스퇴르 학설에 영향을 받아 1867년 소독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외과 수술에 적용하여 수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다.

파스퇴르 업적 중 최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자연발생설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이전 학자들의 주장을 종합하여 생명체는 무기물에 어떤 힘이 오랜 기간 작용하면 저절로 태어난다는 자연발생설을 주장하였다. 이 이론은 이후 오랜 기간 유럽 사회를 지배하는 사상이 되었다. 기독교나 가톨릭교에서는 이 학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강력히 지지하였다. 그래야 하나님에 의한 창조설도 타당할 수 있으니까. 물론 파스퇴르가 생명의 자연발생설을 처음으로 부정한 사람은 아니다. 파스퇴르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자연발생설에 대한 반박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여 모든 사람이 이해하도록 했다.

자연발생설에 대한 부정은 1546년에 이탈리아 의사이자 시인인 프라카스토로 (Girolamo Fracastoro)가 유행병은 전염될 수 있는 작은 물질들에 의해 전염된다고 주장한 것이 시초로 여겨지고 있다. 불행히도 그는 이 작은 물질들이 세균이 아니라 화학물질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1668년에는 현대 실험생물학과 기생충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이탈리아 의사인 레디(Francesco Redi)가 처음으로 실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발생설이 틀렸다고 주장했다. 당시 사람들은 구더기가 썩고 있는 고기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레디가 일련의 실험을 하여 파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고기에서는 구더기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1768년에는 이탈리아 가톨릭 성직자인 스팔란차니(Lazzaro Spallanzani)가 물을 끓인 후 이 물이 공기와 접촉하지 못하면 균이 자라지 않는다고 현미경을 이용하여 보여줌으로써 자연발생설을 다시 부정하였다. 그는 더 나아가 정액과 난자가 만나야 새 생명체가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개구리 알을 이용해 증명해 보였다. 즉 개구리도 무기물질로부터 저절로 탄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가톨릭 성직자들이 자기들 종교마저 부정하게 만드는 과학발견에 크게 공헌하는 경우가 많았다. 1844년에는 이탈리아 곤충학자인 바시(Agostino Bassi)가 곰팡이가 누에 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미생물이 병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파스퇴르도 바시와 유사하게 미생물이 병의 원인 (germ theory of the diseases)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선배 과학자들보다 더 정밀한 방법을 이용하여 자연발생설이 완전히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을 밝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되어 가톨릭과 기독교 집단으로부터 지지받아 이어져 내려오며 유럽 사회를 지배했던 자연발생설은 인류 지성사에서 영원히 추방되고 말았다.

 

코흐 (Robert Heinrich Hermann Koch)

코흐는 독일의 의사, 미생물학자로서 파스퇴르와 함께 세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파스퇴르보다 조금 뒤에 태어났지만, 학문적으로는 파스퇴르의 맞수이자 앙숙이었다고 한다. 탄저균과 콜레라균을 밝혀 탄저병(1877), 콜레라(1885)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정확히 규명하였다.

1882년에 결핵균을 최초로 발견했으며 이 발견으로 1905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지금도 결핵 검사에 사용되고 있는 투베르쿨린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코흐는 훌륭한 제자도 많이 키웠다.

제자인 베링(Emil Adolf von Behring)은 디프테리아에 대한 혈청 면역 연구로 코흐보다 4년 먼저인 1901년에 최초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페트리(Julius Richard Petri)는 지금도 세균이나 세포를 배양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페트리 디시(Petri dish)라는 세균 배양 접시를 개발하였다. 헤세 부부 (Walther Hesse; Fanny Hesse)는 아가(agar)라는 물질에 세균배양액을 넣어 굳혀서 세균을 배양하는 방법 (아가 플레이트, agar plate)을 개발하였는데, 이 방법도 지금 모든 생물학 실험실에서 사용하고 있다.

아가 배양법 개발에 얽힌 이야기와 후일담이 재미있다. 헤세 부부가 소풍 갔을 때 부인이 동네 사람 말을 듣고 가져온 아가가 더운 날씨에서도 녹지 않는 것을 남편이 보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 월터는 그때까지 세균을 배양하기 위해 사용하던 젤라틴 대신 아가를 넣어 플레이트를 만들면 젤라틴이 섭씨 37도에서 녹기 때문에 발생하는 많은 불편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젤라틴 대신 아가를 넣어 플레이트를 만들었다. 예상대로 젤라틴 플레이트와 달리 아가 플레이트는 실온에서도 녹지 않았다.

이 연구결과는 작은 발견이지만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었다. 이 고체 상태의 아가 플레이트 위에 세균을 배양하면 자란 세균을 잘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핵균은 자라는 속도가 느려 몇 달간을 배양해야 하는데 이 고체 아가 플레이트가 없었다면 배양된 결핵균을 관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코흐도 이 아가 플레이트를 이용하여 결핵균을 배양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결핵균에 대한 진단법과 치료법도 나오게 된 것이다.

아가 플레이트는 코흐가 결핵균을 밝혀 노벨상을 받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임에도 불구하고, 코흐가 이런 사실을 논문에 기록하지 않아 헤세 부부가 매우 서운해하였다고 한다. 헤세 부부는 물론 아가 플레이트를 개발한 공로로 발생한 로열티를 단 한 푼도 받지 못하였다고 하니 여러모로 헤세 부부가 억울할 만도 하다. 후에 스트렙토마이신 (streptomycin)을 발견한 왁스만이라는 교수와 그의 제자 사이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여 이 두 사람 간에는 큰 싸움이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때와는 달리 지금은 대학원생들도 적은 몫이나마 특허료를 받을 수 있다.

 

항생제의 발전: 한의학에 가해진 치명적 펀치

에를리히(Paul Ehrlich)와 첫 번째 항생제 살바르산 606

에를리히 역시 코흐의 제자인데 유대계 독일 의사이다. 혈통 문제로 순수 독일인 혈통인 천적 베링에게 조금씩 밀려났다고 한다. 미생물학자·면역학자이자 화학요법 창시자이다. 1908년 유산균 때문에 유명한 메치니코프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항생제 개발은 에를리히가 1909년 매독균 (syphilis) 치료제인 비소 화합물 살바르산 606 (Salvarsan 606=arsphenamine)을 개발한 것을 효시로 본다. 606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606번째로 시도한 후 마침내 이 물질을 찾았기 때문이다. 교토의대를 졸업한 일본인 조수 하타 (Sahachiro Hata)와 함께 연구하여 얻은 성과이다. 하타는 1911년 노벨 화학상, 1912, 1913년에는 노벨 생리상-의학상 후보가 되었지만 끝내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다. 유럽에서 아직 일본이 인정받기에는 이른 시점이었다.

20세기 전까지는 서양에서도 감염병 치료는 2,000년 전부터 내려오던 민간의학에 의존했다. 우리 한의학과 비슷하게 곰팡이나 약초 등을 사용하여 감염병을 치료했다.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로부터 전승되어 오던 치료법이다. 그러다 1877년 파스퇴르와 코흐가 공기에 떠도는 모종의 세균이 탄저균 (Bacillus anthracis)를 억제하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약물 개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염색약으로 다양한 세포 염색을 연구하던 에를리히는 1880년대에 이미 화학합성물로 인체에는 해가 없고 세균만 죽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1909년에 최초의 합성 항생제 살바르산 606을 내놓게 된 것이다.

에를리히는 그의 사촌 웨이거트(Karl Weigert, Carl Weigert)가 염색약을 이용하여 최초로 세균 염색에 성공한 것에 고무되어 어려서부터 염색약을 가지고 염색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 염색약 놀이를 통해 에를리히는 염색 정도에 따라 백혈구 세포를 다양한 세포로 분류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비만세포 (mast cell), 임파구 (lymphocyte), 단핵 혹은 다핵 백혈구 등 백혈구를 현대식으로 분류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적혈구세포도 연구하여 적혈구가 어떻게 분화해 나가는지도 이 염색법을 이용하여 알려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에를리히는 세균도 염색약으로 염색하여 무슨 종류인지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람 염색법 (gram staining)을 개발하여 그람 양성균, 그람 음성균으로 분류하였고, 이 방법은 지금도 세균 관찰 시 필수적으로 시행되는 염색법이다. 염색만이 아니고, 염색약에서 항생제도 개발하였으니 에를리히는 사촌에게 배운 염색약을 잘 이용해 크게 성공한 과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를리히가 염색약을 의학에 적용하기까지 영국과 독일에서는 활발한 염색약 연구 역사가 있었다. 18세기 말엽부터 인도와 이집트에서 걷어 들인 면화 때문에 영국의 면직물 산업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1850년대에는 영국 수출품의 50% 이상이 면직물 제품이었다. 이에 따라 염색 산업도 발전하게 된다.

특히 1856년에는 18세의 퍼킨(Sir William Henry Perkin)이 런던 왕립 화학 대학교(Royal College of Chemistry in London, 현재 Imperial College London의 일부가 됨)에서 호프만(August Wilhelm von Hofmann, 18181892) 교수의 지도하에 말라리아 치료 약 자연산 퀴닌(quinine)을 인공적으로 합성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자연산 퀴닌은 당시에는 매우 비쌌다. 대학 3학년 때 퍼킨은 자기 집 꼭대기에 있던 열악한 실험실에서 우연히 아닐린이라는 화학약품이 자주색을 띠는 새로운 물질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세계 최초 인공 유기화합물 염색약 모베인(Mauveine, aniline purple)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실험이 퀴닌을 만드는 실험과 무관하였기 때문에 퍼킨은 이를 호프만 교수에게 알리지 않고 옷감 염색에 사용해 본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퍼킨은 18568월 특허를 출원한다. 이 당시에는 모든 염색약이 천연산이었기 때문에 비싸고 색이 변화는 단점이 있었는데 퍼킨은 염색약 시장을 한순간에 바꿔버린 것이다. 이 당시 영국 사회는 산업혁명을 겪고 있던지라 퍼킨은 최상의 시기에 염색약을 개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석탄 가스와 음료수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인 콜타르(coal tar)가 퍼킨 염색약의 기초 물질이었으니 퍼킨은 무한대로 모베인(Mauveine, aniline purple)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닦은 셈이었다. 퍼킨은 부자가 되었다. 26세 때인 18666월에 퍼킨은 왕립학회 멤버가 되었고, 46세가 된 1906년에는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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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와 식민지 확보 경쟁에 뒤늦게 뛰어든 독일은 천연염료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공 합성염료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다. 1869BASF(Badische Anilin-und Soda-Fabrik ,Baden Aniline and Soda Factory)라는 독일 화학 회사가 퍼킨보다 하루 먼저 말리자린(alizarin)이라는 밝은 적색 염료 특허를 출원한다. 이후부터 독일 염료 산업이 부흥하여 영국 염료 산업을 완전히 몰아낸다. 1890년대에는 독일이 염료 산업의 독점기업이 된다. 퍼킨은 주식을 팔고 은퇴하게 된다. 독일의 막강해진 염료 산업을 통해 에를리히라는 위대한 의학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에를리히가 학자로서 대성할 수 있게 이끌어주고 도와준 또 다른 사람은 코흐다. 1876년 당시 의대생이었던 에를리히는 코흐의 강연을 처음 들었고, 1882년에는 코흐가 결핵균을 발견한 과정에 대한 강연을 듣고 과학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 강연을 듣고 바로 다음 날 에를리히는 코흐의 결핵균 염색법을 개선하였고, 이후부터 코흐와 에를리히는 아주 가까운 동료가 되었다. 1887년에 베를린 대학에서 무급 강사로 시작한 이후부터 코흐를 따라다니며 연구를 계속했다. 1891년에는 베를린에 새로이 설립된 코흐 연구소(Robert Koch Institute)에서 무보수로 일을 하면서도 코흐가 연구원, 환자, 다양한 화합물, 실험동물에 가까이할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에를리히는 자기 사설 실험실에서 처음 면역학을 연구했다. 리신(ricin)이라는 독극물의 양을 점차 늘려가며 쥐에 주입하자 어느 날 갑자기 쥐가 이 독극물을 과량 주입해도 아무런 탈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쥐에다 아브린(abrin)이라는 다른 독극물을 주입하자 쥐가 죽었다. 리신에 면역이 된 쥐에서 태어난 쥐의 젖을 먹고 자란 새끼 쥐는 잠시 이 독극물에 내성이 생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결과를 바탕으로 면역작용은 주입된 항원 (antigen)에 특이하게 나오는 반응이며, 이런 면역작용은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항원에 대한 항체 (antibody)가 엄마의 젖을 통해 신생아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이런 에를리히에게도 천적은 있었다. 1901년 제1회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베링이다. 코흐는 디프테리아 (diphtheria)와 파상풍 (tetanus)을 해독할 수 있는 혈청을 개발하던 베링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에를리히와 공동 연구를 하라고 권했다. 둘은 의기투합하여 좋은 연구결과를 내게 되어 마침내 1894년에는 임상시험에서도 성공했다.

같은 해 8월에는 Hoechst 회사가 디프테리아 항독소 혈청을 시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로열티를 나누자는 협약을 잘했지만, 시간이 가며 베링이 마음을 바꿔 최종적으로는 이익의 8%만을 에를리히에게 할당해 주었다. 이런 금전적인 문제가 발생한 후로는 둘 사이가 갈라지고 만다. 더구나 1901년에는 디프테리아와 파상풍 혈청을 개발한 공로로 베링이 단독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에를리히는 유대인이고 베링은 아리안계 정통 독일인인데 이런 사태가 벌어지자 둘 사이가 파국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베링은 독일 당국을 끌어들여서 에를리히를 더욱 압박하기도 하였다. 독일 당국은 베링은 지지해주고, 에를리히는 더욱 핍박하였다. 그러나 에를리히도 1908년 마침내 노벨 생리상-의학상을 받았다.

에를리히의 또 다른 난적은 유산균으로 많이 알려진 러시아 메치니코프(Ilya Ilyich Mechnikov)이다. 메치니코프와는 190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 사람과는 금전이나 감정 문제로 사이가 틀어진 것이 아니고, 학설 때문이다.

메치니코프는 세포 중심 면역(cell-mediated immunology), 에를리히는 항체 면역 (humoral immunology, serum therapy)이 중요한 것이라고 서로 반대로 주장하여 사이가 좋지 않았다. 메치니코프는 당시 병리학의 대가 피르호(Rudolf Ludwig Carl Virchow)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피르호와 메치니코프 둘 다 세포에 더 무게를 둔 학자였다.

심지어 피르호는 파스퇴르나 코흐의 학설, 즉 외부에서 침입하는 병원균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생각마저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르호같이 위대한 학자도 이런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코흐는 당연히 에를리히를 편들었다. 지금은 에를리히, 메치니코프 둘 다 옳은 것으로 판정되었다.

에를리히는 세균과 같이 암도 백신을 통해 예방이나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암세포를 약화하게 만든 후 이를 다시 환자의 몸에 주입했다. 바로 종양 면역학의 탄생이다. 이 암에 대한 에를리히의 생각은 오랜 기간 많은 사람이 추종하였다. 그 결과 최근에는 면역학을 이용한 획기적인 암 치료법이 개발되어 나오고 있다.

이렇게 뛰어난 에를리히도 자가 면역 질환 (autoimmune diseases)”이 발생할 것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비웃었다. 그런데 바로 자기 제자이자 유대인인 위텝스키 (Ernest Witebsky)”가 갑상선염 중 일부가 자가 면역질환이라는 것을 밝혀 에를리히의 오류를 고쳤다.

나는 간접적으로나마 위텝스키와는 인연이 있다. 위텝스키가 나치 독일을 탈출한 후 미국에 와서 재직한 버팔로 뉴욕 주립대학 (SUNY at Buffalo)에서 공부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할 당시 유대인 폴란드 의사이자 혈청학(serology) 대가인 밀그롬 (Felix Milgrom)이 미생물-면역학 교실 학과장이었는데, 이분을 나치 치하에서 빼내 버팔로 뉴욕 주립대학으로 데리고 와 키워주신 분이 바로 위텝스키이기 때문이다.

나는 밀그롬에게는 면역학을 직접 배웠다. 밀그롬 교수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 학과 교수들이 먼저 들어 와 수업 준비를 하고, 밀그롬이 멋진 연미복을 입고 강의실에 들어서면 미리 대기하고 있던 교수가 공손히 다가가 연미복과 모자를 조심스레 받아 걸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때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뭐 이런 것이 있나 하는 반발심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아련한 추억일 뿐이다. 그 당시 그 학과 교수들은 위텝스키와 밀그롬을 정말 존경했던 것 같다. 나는 이 두 교수가 에를리히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한 참 후에나 알았다. 그리고 그곳 교수들이 암에 특이적인 항원을 찾으려 그렇게 노력하던 것도 결국 에를리히의 영향이었음도 나중에야 알았다.

현재도 전립선암 진단 마커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전립선 특이 항원(prostate specific antigen, PSA)이 버팔로에서 처음 개발된 것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 당시에는 버팔로 뉴욕 주립대 의과대학도 나름 학문적으로 공헌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모두 떠난 지금은 물론 예전만 못하다. 이런 것을 보면 제대로 된 학자들이 있어야 대학이 제대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대학에도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교수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물론 나 자신부터 많이 반성하면서.

아리아인 베링과 달리 유대인 에를리히는 독일에서 많은 부침을 겪었다. 1910년에 프랑크푸르트에 생긴 에를리히라는 도로 이름은 나치 시절 사라졌다가 2차 세계대전 후 많은 거리가 다시 에를리히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954년에는 에를리히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우편도 발행되었다. 에를리히 연구소도 건립되고, 그의 사진이 들어가 있는 마르크화도 통용되고 있다. 학회에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에를리히를 기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1940년 로빈슨 (Edward G. Robinson) 주연의 “Dr. Ehrlich's Magic Bullet”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여 많은 사람이 관람하였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물론 배포가 금지되었다.

에를리히가 이렇게 조명받는 까닭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이 자본과 학식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으니까. 참으로 대단한 유대인들이다.

 

도마크의 설폰아마이드:

1932년 바이엘(Bayer) 사에서 일하던 독일인 의사이자 미생물학자인 도마크(Gerhard Johannes Paul Domagk)은 에를리히의 염색법을 이용하여 연구하던 중 설폰아마이드(Sulfonamide, KI-730)를 항생제로 개발하여 프론토실(Prontosil)이라는 상품명으로 시장에 내놓았다. 이 약은 다양한 그람 양성균에 효과가 있다. 도마크는 자기 딸 팔이 감염되어 절단해야 할 처지에 놓이자 이 약을 투여하여 자기 딸 팔을 구하였다. 1939년 이 업적으로 도막은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독일 나치 정부는 도마크가 이 상을 거부하도록 종용했다.

1935년 나치 반체제 인사 오시에츠키(Carl von Ossietzky)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데에 대한 보복 조치였다. 1947년 도마크는 시간이 지나서 상금은 받지 못하였지만 결국 노벨상을 받았다. 우리나라 지금 상황이라면 감지덕지할 일인데 참 황당한 일이다. 설폰아마이드는 그 후에 등장하는 페니실린에 밀려나지만, 결핵약 이소니아지드(isoniazid)와 박트림 (bactrim)이라는 신약개발로 이어져 현재도 많은 환자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첫 번째 자연산 항생제 티로트리신의 등장

1939,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프랑스 태생 미국 미생물학자 두보스 (René Jules Dubos)는 토양세균(Bacillus brevis)에서 항생제 티로트리신(tyrothricin)을 추출하였는데 이는 그리미시딘(gramicidin) 20%와 티로시딘(tyrocidine) 80%가 혼합된 첫 번째 자연산 항생제이다. 그리고 세균으로부터 분비된 자연산 항생제로서는 첫 번째로 상업적으로 제조된 것이다. 2차 대전시 많은 연합군을 부상으로부터 구한 약이기도 하다. 독성 때문에 주로 외상용 연고로 사용되고 있다.

두보스는 1969년 그의 저서 그래서 인간 동물: 주변 환경과 사건에 의해 우리가 형성되는 방식(So Human an Animal: How We Are Shaped by Surroundings and Events)으로 논픽션 부분 퓰리처상(Pulitzer Prize for General Non-Fiction)을 수상하였다.

 

페니실린

플레밍, 플로리, 체인 이 세 명이 페니실린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5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을 하게 되었다. 페니실린 개발을 통해 현대의학은 진정으로 세균에 의한 감염병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수술발전과 함께 페니실린 발견이야말로 한의학이 서양의학에 밀려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플레밍(Sir Alexander Fleming)

스코틀랜드인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은 준비된 우연에 의한 것임은 잘 알려져 있다. 1914년에서 1918년까지 진행된 제1차 세계대전 중 많은 병사가 부상 부위의 세균 감염에 따른 패혈증(sepsis)으로 사망하였다. 특히 상처 부위를 소독약으로 치료받은 부상병들이 오히려 소독처리를 받지 않은 환자보다 더 많이 죽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플레밍은 상처의 표면만 소독처리 하는 것은 오히려 유해하다고 주장하였다. 상처 표면에 있는 균이 분비하는 항생물질이 상처 깊은 부위에서 균이 자라는 것을 억제하는데, 상처 표면만을 소독하면 오히려 이 항생물질이 줄어들게 되어 상처 심부에서 병원균이 더 잘 자라 패혈증에 더 잘 빠진다고 주장한 것이다. 플레밍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험결과를 담은 논문을 란셋(Lancet) 학술지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의관들은 플레밍의 이런 주장을 따르지 않고 계속 소독약을 사용하여 병사들의 병을 더욱 악화시켰다. 항생제가 없는 당시의 사정이 얼마나 참혹하였는지를 잘 알려주는 사례이다. 플레밍은 1923년에는 감기 환자의 콧물 속에서 라이소자임 (lysozyme)이라는 효소를 발견하여 항생제로 개발하려고 하였으나 라이소자임을 항생제로 개발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플레밍의 실험실은 깨끗하지 않았다. 실험실을 지저분하게 유지한 덕분에 오히려 1928년 페니실린(benzylpenicillin=Penicillin G)을 곰팡이(Penicillium notatum)에서 발견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그는 천운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다.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어떤 드라마보다도 더 극적이다.

8월 휴가를 가족과 함께 보내고 플레밍은 192893일 실험실에 복귀하였다. 휴가 가기 전 포도상구균(staphylococci)을 재배하던 플레이트를 실험실 한구석에 쌓아놓은 채로 휴가를 떠나버린 것입니다. 실험실에 돌아와서 방치된 플레이트를 치우는 과정에서 그는 몇 개의 플레이트가 곰팡이에 오염이 되어 있는데 그 주변에는 포도상구균이 자라지 못하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 유명한 말 그것참 신기한데 (That's funny)”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오염된 플레이트를 그의 조수였던 프라이스(Merlin Price)에게 보여주며 의견을 묻자 프라이스가 라이소자임도 그렇게 우연히 발견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였다. 이 조언이야말로 플레밍이 진지하게 오염된 플레이트를 연구하도록 만들었던 진정한 자극제였던 셈이다.

플레밍과 프라이스의 이런 사례를 보면 남의 말에 겸손히 귀 기울일 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물론 주변에 똑똑한 사람이 있으면 더욱 좋고. 플레밍은 오염시킨 곰팡이가 Penicillium notatum이라는 것을 알아내었고, 192937일 곰팡이가 분비하여 포도상구균 성장을 억제한 성분을 페니실린 (penicillin)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일련의 실험결과를 정리하여 1929년 실험병리학회지(Journal of Experimental Pathology)에 발표했으나 동료학자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하였다. 플레밍은 후속연구를 진행하며 이 곰팡이가 키우기도 어렵고, 이 곰팡이 배양액으로부터 페니실린 (penicillin)을 정제하는 것은 자기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플레밍은 1940년까지 곰팡이를 계속 나눠주며 페니실린 (penicillin) 연구를 함께 할 수 화학자들을 구하였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플레밍은 마침내 페니실린 연구를 포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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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 (Howard Walter Florey, Baron Florey)

플레밍이 페니실린 (penicillin) 연구에 지쳐 포기할 무렵인 1938,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플로리라는 호주 출신 의사가 플레밍의 논문을 읽게 되었다. 1940년 플로리는 이 연구에 큰 흥미를 느껴 체인 (Ernst Boris Chain), 히틀리 (Norman George Heatley), 호즈킨 (Dorothy Mary Hodgkin=Dorothy Crowfoot Hodgkin 1964년 노벨 화학상 수상) 등을 모아 팀을 꾸려 페니실린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는 2차 세계대전 중이라 항생제 개발이 시급하였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들이 옥스퍼드라는 명문대학에서 연구하고 있었고 부상한 군인들을 치료하는 데에 항생제가 시급히 필요해서 연구비를 쉽게 지원받았을 것이다.

플로리는 옥스퍼드팀을 만들어 플레밍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포기한 일을 성공시켜 페니실린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플로리는 환자에게 페니실린을 처음 투입하여 그 효과를 검증하는 일도 진행하였다. 그전에는 쥐를 이용하여 효능검증만 했기 때문에 임상시험이 매우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약 부작용 등 너무나 많은 사항이 불투명했기 때문에 사람에게 투여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건강한 사람에게 확실하지 않은 약을 투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주 위급하여 어떤 조치라도 수용할 수 있는 환자들이 필요하다. 페니실린의 경우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환자가 플로리가 있는 병원에 입원하였다. 알렉산더 (Albert Alexander)라는 43세의 남자였는데, 입 주변이 장미 가시에 긁혀 이로 인해 패혈증에 빠진 것이다. 당시 가능한 모든 조치를 했으나 적절한 항생제가 없던 시절이라 이 환자가 아주 위중한 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얼굴이 너무 부어 통증 때문에 눈을 뽑기까지 하였다. 환자 상태가 너무 나빠지자 담당 의사들이 이 환자를 플로리에게 보냈다.

1941212, 플로리는 페니실린을 알렉산더에게 투여하였다. 그러자 24시간 후 열이 떨어지고, 식욕이 돌아오고, 감염증이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페니실린이 많지 않아 알렉산더에게 충분히 투여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상황이 급해지자 알렉산더의 소변에서 페니실린을 다시 추출하여 투여하기도 하였으나 이 환자는 결국 죽고 말았다.

전장에서 부상한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페니실린을 먼저 그곳으로 보내야 했기 때문에 알렉산더에게는 충분한 양의 페니실린을 투여할 수 없었다. 페니실린이 많이 생산되지 않아서 플로리도 어쩔 수 없었다. 플로리는 이후에는 많은 양이 필요하지 않은 아이들에게만 페니실린을 투여하여 치료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상황을 겪으며 플로리는 페니실린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러 시도 끝에 마침내 대량생산 방법을 찾아내었다. 이로써 서양의학을 세균 정도는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현대의학으로 탈바꿈시키게 되었다. 참으로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체인 (Ernst Boris Chain)

체인은 그의 동료 아브라함 (Sir Edward Penley Abraham)과 함께 페니실린을 정제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1940년에 발표했다. 체인은 유대인이어서 나치 독일에서는 자신이 안전하지 못할 것을 알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1933년 영국에 도착했을 때는 주머니에 단돈 10파운드만 남았다. 영국태생 인도인으로서 저명한 유전학자이자 생리학자인 홀데인(John Burdon Sanderson Haldane)의 도움으로 영국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병원(University College Hospital)에서 직장을 구해 삶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홀데인도 인도인이었으니 영국 생활에서 어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역시 어려움을 경험한 사람들이 난처한 지경에 빠진 사람들을 쉽게 돕는 것 같다.

체인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35년부터 옥스퍼드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며 이것저것 연구하고 있었는데, 1939년 플로리가 옥스퍼드 자기 팀에 합류시켜 페니실린 연구를 하게 한 것이다. 체인은 자기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간직하여 자기 자식들을 유대인으로 길렀다고 한다. 1964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Imperial College London) 대학의 생화학과 설립자이자 학과장으로 복무하였다. Imperial College London 대학은 그가 근무하던 생화학과 빌딩 이름에 그의 이름을 붙여 그를 기리고 있다.

아브라함은 페니실린 개발로 노벨상을 못 받았으나 그 후 세팔로스포린(cephalosporin) 등 많은 항생제를 개발하여 현대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이런 연구결과를 특허 출원하여 아브라함은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 돈을 옥스퍼드 대학에 기증한 아브라함을 기려 최근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세 동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

 

히틀리 (Norman George Heatley)

히틀리는 페니실린을 대량으로 정제하는데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페니실린 개발자 중 가장 인정을 받지 못한 연구자이다. 히틀리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1933년 학사, 1936년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다. 1940년에는 플로리를 도와 쥐에 페니실린을 투여하여 항생제 효과를 증명하기도 하였다. 1941년에는 전쟁 때문에 급증한 페니실린의 수요를 맞추기 위하여 플로리와 함께 미국에 가서 모이어(Andrew J. Moyer)와 함께 일하였는데 나중에 이 사람이 페니실린 대량생산 방법을 혼자 이름으로 특허 출원하게 된 것을 알았다. 특허료를 독차지하기 위하여 모이어가 히틀리를 따돌린 것이다.

1990년 옥스퍼드 대학은 8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의사가 아닌 사람에게 명예 의학 박사학위를 수여하여 히틀리의 업적을 기려주었다. 히틀리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인정을 받은 것이다. 1998년 헨리 해리스 경은 플레밍 없이 체인 없고, 체인 없이 플로리 없으며, 플로리 없이 히틀리 없고, 히틀리 없이 페니실린 없다 (Without Fleming, no Chain; without Chain, no Florey; without Florey, no Heatley; without Heatley, no penicillin)고 하며 히틀리의 업적을 기려주었다고 한다. 때로는 운이 실력보다 더 강한 것 같다.

1941127일 일본이 갑자기 진주만 공격을 하자 놀란 미국은 플레밍과 옥스퍼드 플로리 팀이 이루어 놓은 페니실린 생산과 정제법을 이어받아 대량생산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46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될 당시에는 모든 연합군 부상병을 치료할 수 있을 만큼 많이 페니실린이 확보되었다. 물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 측에는 전혀 공급하지 않았다. 페니실린이 개발된 데에는 이렇게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이 큰 역할을 했다.

인류는 전쟁에서 이기려고 군인을 살리는 페니실린을 개발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페니실린으로 돈을 벌었다. 페니실린이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자, 이번에는 돈 벌기 위해 다양한 항생제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면서 의학은 세균을 정복할 수 있게 되었고, 더욱 발전하였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간다. 어쩔 수 없다. 의사들 포함, 돈 탐하는 사람들을 그래서 비난할 수 없다.

 

뒤세네(Ernest Duchesne)와 트위트(Clodomiro Picado Twight)

재미있는 사실은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찾아내기 32년 전인 1897년 프랑스 의사 뒤세네가 이미 일부 곰팡이가 세균을 죽이는 물질을 분비한다는 사실을 보고했다는 점이다. 뒤세네는 리옹 의대 졸업논문으로 장티푸스균이나 대장균으로 감염시킨 쥐에다 곰팡이 (Penicillium glaucum) 배양액을 투입하면 쥐가 살아나기 때문에 곰팡이가 균을 죽일 수 있는 물질을 분비한다는, 즉 플레밍과 똑같은 보고를 하였으나 당시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에서는 이런 학위논문을 받았는지조차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23세 무명의 뒤세네가 철저히 무시된 것이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는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일하던 코스타리카인 트위트가 플레밍과 똑같이 페니실리움 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을 억제한다는 보고를 하였는데, 파스퇴르 연구소에서는 이 연구결과를 또 무시하고 만다. 파스퇴르라는 최고의 미생물학자를 배출한 프랑스로서는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이런 실수가 발생했다는 점을 참으로 애석하게 생각할 것 같다. 현재 코스타리카에서는 트위트 이름을 딴 여러 개의 연구소와 학교가 있고 국가 과학상과 기술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고 한다. 트위트는 죽어서나마 코스타리카 사람들의 자랑거리가 된 것 같다.

 

왁스만 (Selman Abraham Waksman)의 스트렙토마이신

왁스만은 러시아 태생 유대인인데 미국에 이민 와서 대성한 학자이다. 뉴저지주의 럿거스 농대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은 후 1918년 버클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럿거스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토양 속에 있는 균에서 항생제를 발견했다.

대표적인 항생제가 첫 번째 결핵치료제로 사용된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이다. 왁스만은 이 업적으로 1952년 노벨상을 받았다. 네오마이신 (Neomycin)도 왁스만이 발견하였다. 이 외에도 20종 이상의 다양한 항생제를 발견하여 현대의학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농대를 졸업하였지만, 의학에 누구보다 많은 공헌을 하였다. 연구자에게는 학부 때 전공이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에서는 학부를 엄청나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항생제(antibiotic)라는 단어도 왁스만이 유행시킨 단어다.

이렇게 많은 업적을 남긴 왁스만도 자기 대학원생에게는 가혹했던 것 같다. 1952년 왁스만이 노벨상을 받게 되자 왁스만의 대학원생이었던 샤츠 (Albert Schatz)라는 학생이 돌연 자기가 스트렙토마이신을 발견했으니 자기도 수상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벨위원회에서는 스트렙토마이신 발견 당시 샤츠는 단지 대학원생이었을 뿐이니 노벨상을 받을 수 없다고 간단히 정리해버리고 만다. 문제는 스트렙토마이신 특허권 신청 시에도 왁스만이 샤츠를 배제한 것이다. 나중에는 왁스만과 럿거스 대학은 샤츠에게 특허료 일부를 주는 것으로 합의하고 일을 마무리 지었다. 대학원생들의 비애가 가장 잘 드러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항생제 개발은 미생물에 감염된 수많은 사람을 손쉽게 치료할 수 있게 해준 대단한 일이다. 수많은 연구자의 영광과 경쟁과 시기 질투와 음모와 갈등과 돈이 얽힌 장편 드라마다. 과학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 이런저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더러움이 없을 수 없으니. 그렇다고 피하기만 해도 안 된다. 더러움을 딛고 일어서면 되는 것이다.

아직도 더 나은 항생제를 개발하기 위해 많은 연구자가 노력하고 있다. 불행히도 세균들도 진화하여 내성균으로 변모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항생제 전과 후는 명백히 다르다. 내성균에 의한 사망률도 항생제 전과 비교하면 별것 아니다. 항생제 개발로 인해 한의학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시행되던 전통의학은 입지가 크게 줄어들었다. 우리나라 한의학은 전통의학 중에서 국가의 정책적 보호로 인해 그나마 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항생제는 항암제로도 개발되어 지금도 암 환자들에게 많이 사용되고 있다.

세균은 거의 정복되었으나 요즘 전 세계 인류를 무력하게 만들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에서 보듯이 바이러스는 아직도 치료할 수 있는 약품이 제한되어 있다. 앞으로는 바이러스를 정복할 수 있도록 많은 연구가 이루어질 것으로 본다. 시간과 돈이 있으면 현명한 과학자들이 해낼 것이다. 과학에도 돈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서글프지만 인간사회이니 어쩔 수 없다. 우리나라도 많은 돈을 투자하여 과학 기술에 열정을 불태우는 인재를 육성시켜야 한다. 돈과 시간을 투자하면 된다고 믿고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려줘야 한다. 어느 나라든 흥망성쇠는 과학의 힘이 좌우하게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