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체 오디세이 : 인간의 근원을 찾아서
왜 사람은 사람을 낳고, 소는 송아지를 낳고, 개는 강아지를 낳고, 뱀은 뱀을 낳을까? 누구나 하는 섹스에서 유전체가 밝혀지기까지의 역사
자웅이체 생물들에게 성욕은 너무나 강렬하여 부처님마저도 이런 장애가 두 가지만 있어도 자신은 성불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하셨다. 종족보존을 위해서라도 피할 수 없는 행위이다. 본능이다 보니 강력한 쾌락도 따르기 마련이다. 사마귀는 교미 중에 암컷이 수컷을 머리부터 잡아먹기도 하는데, 머리가 잘리면 억제 신경이 없어져 성행위가 더욱 격렬해진다고 한다. 누구를 위한 쾌락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의 교미 대가치고는 너무 크다. 지능이 좋은 인간과 보노보는 출산이 아니라 즐거움을 위해 시시때때로 섹스에 탐닉하는 희귀 동물이다. 섹스는 자웅이체 모든 생물에게 중요한 일이지만 정작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비교적 최근에야 밝혀졌다.
약 15만 년 전에 지구에 나타난 호모 사피엔스, 즉 현명한 인간은 오늘날 70억 인구가 되어 지구를 점령하고 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성교가 있었겠는가? 그 많은 행위가 있었지만, 왜 남녀가 교접을 통해서만 자손을 낳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처음으로 기록을 남긴 사람은 약 2,600년 전의 그리스 수학자 피타고라스라고 한다. 과학은 의문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의문에 대한 답이 맞건 틀리건 그건 나중 문제이다. 질문에 대한 처음 답이 틀려도 후세 사람들이 반드시 그 문제에 대해 정답을 찾아주는 것이 과학이다. 그래서 해답보다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
피타고라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체란 아주 조그만 형체로 이미 존재하던 몸이 발생 중에 단지 커지는 것인가? 아니면 형체가 없던 것이 후에 성체의 모습을 갖게 되는가?”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의문을 가졌다. 히포크라테스를 잇는 유명한 의학자 갈렌(Claudius Galenus) 등은 전자 즉 전성설을 받아드려 발전시켰고, 이 학설이 기독교 신학과도 부합해 17, 18세기에는 정자 혹은 난자에 축소형 인간 호문쿨루스(homunculus)가 있다는 주장이 널리 퍼졌다.
정자론자 중 대표적인 인물은 1677년 현미경을 사용하여 정자를 처음 발견한 레벤후크(Antonie van Leeuwenhoek)이고, 난자론자로는 콩팥의 신소체를 발견하여 신장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말피기(Marcello Malpighi)가 있다. 레벤후크, 말피기 두 분 모두 의학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지만, 이런 실수도 하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레벤후크는 다양한 미생물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정액을 처음으로 발견한 하르트수커(Nicolaas Hartsoeker)는 1694년에 정자 안에 웅크리고 있는 조그만 인간의 형태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전성설의 아이콘이 되어 지금도 생물학 교과서에 많이 실리고 있다. 재미있는 유산이다.
전성설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첫째, 정자나 난자 속에 아무리 많은 초미니 인간, 즉 호문쿨루스가 들어있다 해도 그 숫자가 제한되어 있어 자손이 무한정 태어날 수는 없다. 소위 러시아 인형 패러독스(paradox of Russian Doll)라는 것이다. 둘째, 정자나 난자 어느 한쪽에만 호문쿨루스들이 미리 만들어져 있다면 자손은 부모 중 어느 한쪽만 닮아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셋째, 생명체가 정자나 난자 속에 이미 완성되어 있다면 돌연변이와 진화는 일어날 수 없는데 진화와 돌연변이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적 모순 때문에 일부 과학자들은 전성설에 강력한 의구심을 품었다. 논리적으로 잘 생각할 수 있으면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잘 가르쳐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급기야 1759년, 볼프(Kaspar Friedrich Wolff)는 후성설을 주장하였고, 배어(Ernst von Baer)는 1827년 포유류에 난자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1859년에는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여 진화론을 주장하였고, 마침내 1865년 오스트리아 가톨릭 사제인 멘델 (Gregor Johann Mendel)이 유전 법칙을 처음 발견하였다. 불과 120여 년 전이다.
멘델이 위대한 이유는 유전자가 생물체 몸속에 있는 물질이고 이 물질이 대를 이어 특성을 나타내준다는 점을 처음 발견했기 때문이다. 멘델 이전에는 유전자가 생물체 속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물질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멘델을 통해 유전이 뜬구름 같은 존재가 아니라 생물체 자체 내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물질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멘델이 가톨릭 사제라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멘델이 유전을 정신적인 것에서 물질로 치환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멘델의 삶을 조금 들여다보면 멘델의 이런 반 신앙적인 행위가 결코 우연은 아니다. 멘델은 가난 때문이지 자신이 원해서 사제가 된 것은 아니다. 멘델은 1822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난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농사와 원예 일을 하면서 자연 과학에 흥미를 느꼈고, 김나지움(요즘 중·고등학교)을 마친 후 대학교에 가고자 하였으나 아버지가 강제노동으로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하고,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하여 그레고리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돈 없는 사람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성직자가 되는 길이어서 멘델은 그 길로 간 것이다.
멘델은 신학교에서 과학에 대한 지식도 많이 배웠다. 1850년, 멘델은 빈 대학교에 입학하고자 하였으나 입학시험에서 실패하였고, 정규교사 시험에서도 낙방하여 교사가 되지 못하였다. 그 뒤 대수도원장의 추천으로 빈 대학교에 청강생으로 입학하여 생물학 등 자연 과학을 배웠다. 1856년부터는 수도원 조그마한 뜰에서 완두콩에 대한 실험을 시작하여 7년 후 위대한 ”멘델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1865년 이 사실을 브륀의 자연 과학 협회의 정례회에서 발표하고, 1866년 이 내용을 학술지에 발표하였으나, 이 학술지가 워낙 미미한 학술지였고 과학자 집단마저도 연구결과를 무시하여 논문발표 후 35년 동안 오직 3회만 인용되었다. 불행하게도 다윈도 이 논문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한다. 멘델은 이렇게 철저히 과학계에서 무시되고 배척된 실패자가 되었다. 멘델은 1867년 이후에는 가톨릭 교단의 대수도원장 직을 수행하였을 뿐 더 이상의 연구는 할 수 없었다. 대수도원장 직 수행하기에도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멘델은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재발견 되어 인류 지성사에 길이 빛나는 존재로 올라서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과학자들은 인용지수가 높은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전 세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최근에도 몇몇 과학자가 아주 미미한 학술지에 발표하였으나 후에 인정을 받아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02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일본의 다나카 고이치, 2015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중국의 투유유 모두 학사가 최종학력이고 저명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지도 못했지만 후에 인정받게 된 것이다. 혁신적인 과학은 처음에는 전문가들마저도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독일 과학자 헤르트비히(Oscar Hertwig)은 1876년 정자가 난자를 뚫고 들어간다는 것과 감수분열 시 염색체 숫자가 줄어든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고하였다. 1885년에는 후에 염색체 속 뉴클레인이 유전물질이며 정자가 바로 이 물질을 전해주기 위해 난자 속으로 뚫고 들어간다고 주장하였다. 헤르트비히에 의해 비로소 멘델이 추정한 유전물질이 뉴클레인으로 좁혀진 것이다. 뉴클레인은 후에 핵산(nucleic acid)으로 밝혀진다.
1900년에는 코렌스(Carl Correns), 체르마크(Erich von Tschermak), 더프리스 (Hugo De Vries) 3명의 과학자가 각자 독립적으로 한 연구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과거의 논문을 살피던 중 멘델의 발견이 자기들 발견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고 절망했다고 한다. 자기들 업적이 멘델에 의해 가려지게 되었기 때문에 크게 상심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멘델의 업적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재평가하여 이 세상에서 빛 보도록 만들었다.
1911년에는 모건(Thomas Hunt Morgan)이 초파리 연구를 통해 염색체에 유전물질이 있다고 발표하여 193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모건이 초파리를 연구한 미국 콜럼비아 대학교는 이후로 초파리 대학으로 유명해지고, 생물학계에서는 초파리가 아주 중요한 연구재료로 활용되게 된다.
1944년에는 에이버리(Oswald Theodore Avery Jr)가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사실을 처음 증명하였다. 에이버리는 불행히도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데, 실험상의 사소한 결함도 있었지만 이보다는 당시 힘 있고 저명한 교수들이 단백질이 유전물질이라고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이다. 헤르트비히와 모건이 주장했듯이 염색체 속에 유전물질이 있다는 것은 당시 이 분야에서 연구하는 모든 과학자가 동의하였는데, 염색체 속에는 단백질과 핵산이 반반씩 있어 아직 주류 과학자들이 에이버리 연구결과를 믿어주지 않은 것이다.
단백질이 유전자라고 주장했던 저명 과학자들은 지금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반면에 에이버리는 교과서에 당당히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1953년에는 왓슨(James Dewey Watson)과 크릭(Francis Harry Compton Crick)이 DNA 구조를 밝혀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논란에 종지부가 찍히고, 이 연구결과로 이 둘은 1962년 노벨상을 받는다. 우리나라는 1944년은 일제 식민지 시대, 1953년은 6.25 전쟁으로 과학은커녕 매일매일 살아내기도 벅찬 시절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나라가 왜 지금도 과학에 취약한 것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과학은 성장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과 지성을 요구한다.
1977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생어(Frederick Sanger)는 염기서열 순서를 정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1980년 두 번째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생어는 1958년에는 인슐린 단백질 서열을 밝혀 이미 첫 번째 노벨상을 받아서 1980년 수상은 두 번째가 된 것이다. 생어 이름을 딴 생어 센터는 유전체 연구의 중심지가 되어 오늘날까지 수많은 공헌을 해오고 있다. 영국에서는 이런 첨단 연구가 진행되고 있던 1980년, 광주에서는 민주화운동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참혹하게 살상되었다. 이 사건은 아직도 우리 역사 속에서 정리되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
1985년 신스하이머(Robert L. Sinsheimer)를 비롯한 몇몇 과학자들이 약 60억 개에 달하는 인간유전체 염기서열을 전부 밝히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였다. 이 당시 생어 방법으로는 기껏해야 하루에 500개 염기 정도만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제안은 참으로 망상에 가까운 제안이었다. 당연히 많은 의생물학자는 이 계획안에 반대하였다. 반대하는 내막에는 이 연구에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면 타 분야 연구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이 희생될 수 있다는 염려도 한몫하였다.
이러한 많은 반대와 논란에도 불구하고 1988년 이 연구안은 의회를 통과하였고, 1990년 15년 계획으로 30억 달러 (약 3조 원) 예산이 책정되었다. 이 연구를 마치는데 최종적으로는 총 50억 달러가 소요되었다. 미국이 시작하였으나 1993년 영국의 비영리 재단인 웰컴 트러스트(Wellcome Trust)의 지원을 받은 생어 센터가 합류하였고, 프랑스, 일본,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독일과 중국이 참여하였다. 중국은 이 연구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지금 유전체 연구에 있어서 최전방에 있다.
총 6개국의 20개 연구소가 이 연구에 참여하여 인간유전체 사업단(Human Genome Organization, HUGO)이란 컨소시엄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이 사업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꼼꼼하고 논리적이고 차분한 과학자들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학자적인 태도로 차분히 연구를 진행했다. 경쟁자 없는 상태에서 나름 편하게 연구한 것이다.
그런데 야망이 크고, 이런 느린 연구 진행에 불만을 품은 벤터(Craig Venter)가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을 버리고 나와 게놈연구소(The Institutefor Genomic Research, 일명 TIGER)라는 벤처회사를 설립하였고, 1998년에는 셀레라 제노믹스(Celera Genomics)라는 회사를 출범시키면서 3년 안에 3억 달러만 들여 인간유전체 염기서열 분석을 완성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당시에는 이미 퍼킨엘머 사가 자동화 염기서열 분석장치를 처음 개발하여 세계 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는데, 벤터 박사는 이 회사 장비를 대규모로 사들여 색다른 방법으로 인간유전체 염기서열 분석을 수행하겠다고 나섰다. 벤터는 이미 사업가가 되어 이 사업을 상업적으로 바라본 것이다. 이에 자극을 받은 국제컨소시엄도 1998년 9월 유전체서열 분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경쟁이 붙은 것이다. 양 팀은 상대보다 더 빨리 나가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양측에 의해 신기술이 계속 개발되었다.
결정적인 기술은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 기술(next generation sequencing, NGS)과 생물 정보학(bioinformatics)이다. 인간 유전체서열 분석 초안이 마련된 2000년 6월에는 미국 클린턴(Bill Clinton) 대통령과 영국 블레어(Tony Blair) 수상이 이 일을 공적 분야에서 진두지휘한 콜린스(Francis S. Collins)와 벤처회사 회장인 벤터를 대동하고 이목을 집중한 전 세계인들에게 TV를 통해 생중계로 발표했다.
처음 계획했던 2005년보다 4년 앞당긴 2001년에는 양 팀이 초안 결과를 각각 네이처, 사이언스 학술지에 발표하였다. 그 후에도 미진한 부분을 계속 해결해오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인류는 지구상에 생명체가 태어난 지 35억 년이 지나, 인류가 나타난 지 15만 년이 지나 비로소 정자가 난자를 만나면 무엇이 전해지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즉 인간은 왜 인간을 낳고, 소는 왜 송아지를 낳고, 뱀은 왜 뱀을 낳는지 그 구체적인 정보를 우리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나라 연구진은 이 연구 프로젝트에 아무도 참여하지 못했지만, 초안이 나온 후에는 서울의대 서정선, 김종일 교수팀이 마크로젠이라는 벤처회사와 함께 좋은 연구를 하고 있다. 특히 재미교포 찰스 리(Charles Lee) 박사는 세계 최초로 인간에서 유전체 단위 반복 변이(copy number variation, CNV)가 존재함을 보고하였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찰스 리는 현재 미국 잭슨 랩 유전체 의학 연구소의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대단히 영광스러운 직책이다.
첫 번째 인간의 유전체를 밝히는데 약 5조 원이 들었지만, 지금은 기술이 폭발적으로 개선되어 한 사람의 유전체 전부를 밝히는데 약 1,000달러(약 100만 원)면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하다. 앞으로는 더욱 저렴해질 것이다. 아직 분석된 유전체 정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지만, 유전체 정보처리 기술도 계속 발전하고 있어 조만간 수많은 유전체 빅데이터를 이용해 마련된 정보를 의학,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함으로써 인간 삶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유전체 사업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지성과 재능이 모이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속도로 엄청난 혁신을 이루는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고, 이에 따라 첨단과학 분야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인간들은 필요하면 이렇게 기술을 발전시킨다. 경쟁의 무서움이고, 돈 있는 곳에 재능있는 인간들이 몰리는 자본주의 시장원리이다. 이런 지능싸움에서 밀려나면 개인이나 국가가 존립하기 어려워진 지식기반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21세기 생존의 기반은 지능과 재능과 혁신과 속도이다.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는 없고, 승자독식 세상이 되어 소수의 사람이 세상을 지배할 것 같다. 생존하기 위해 각자 더 많이 노력해야 하는 세상과 대면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미래가 인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능력 없는 자 언제나 고달픈 인생이다.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아버지가 두 명의 여자와 결혼한 남자. 아버지의 두 명의 여자 중 숨겨진 여자를 어머니로 둔 남자.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남자. 아버지의 성 대신에 어머니의 성을 쓰며 사는 남자. 게이로 살았으나 운명적인 두 여자와 뜨겁게 사랑을 나누기도 한 남자. 두 명의 아이를 둔 동료 부부와 함께 살며 바로 그 동료의 부인과 사랑을 하며 지내다 마침내 그 여자를 자기 아내로 삼아 자기 아이를 낳게 한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