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사람 이야기 #1
물은 반응하지 않는 성질까지도 생명의 기본을 이루게 하니 물을 떠나서는 생명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은 공포홍보를 이겨내는 건강한 과학적 논리를 키우지 않는 점이다.
2020-07-06 이기태
-Prelude-
‘Journal EACH’의 편집국장으로부터 톡을 받았다. 이미 사석에서 EACH의 창간 의도와 활동계획에 대해서 편집국장으로부터 얼핏 들은 바가 있었지만 집필진이 되라는 요청이 구체화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Journal EACH’의 편집국장으로부터 톡을 받았다. 이미 사석에서 EACH의 창간 의도와 활동계획에 대해서 편집국장으로부터 얼핏 들은 바가 있었지만 집필진이 되라는 요청이 구체화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과학적 사고가 오래된 나로서는 대뜸, 원고 형식과 분량 그리고 기고 시기와 빈도를 아니 물어볼 수 없다는 질문에 답은 ‘자유’ 란다. 과학이라는 객관이 일상화된 사람에게 자유는 쉽지 않은 개념이다. 사물과 현상을 인간의 시각에서 보지 않고 물질의 관점에서 보아왔으니, 갑자기 자유가 오히려 속박으로 들린다.
카테고리 방 이름도 자유라 하며 다른 분들의 이름을 예시로 주는데, 대부분 ‘~~ 이야기’ 이다. 물론 자유롭게 정해도 된다고 하였으나 전체적 균형을 보자니 ‘~~ 이야기’가 옳을 것 같다. 아직은 자유가 자유롭지 못한 세대여서, 멍석을 깔아 놓아도 튀게 놀지도 못하지만 객관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생물은 물에서 기원이 되었으니 당연히 물로 구성이 되어있고, 물이 만들어 주는 지구환경에서 물의 특성에 맞추어 생리 생태적으로 진화되어 왔으니 물을 떠나서 살 수는 없으니 생물인 사람이 물과 카테고리 방 이름을 맞추는 것은 당연해서 오히려 그 이름은 ‘자유’롭지 못하기도 하다.
생물을 이야기 할 때에는 과학적 관점이 주가 되지만 사람을 이야기 할 때에는 인문학이 주가 된다. COVID19와 방역 속에는 일상의 변화는 물론 ‘비자유’라는 의무사항이 따르니 과학은 인문사회학이 함께해야 하는 세상이다. 생물 중의 ‘사람’을 이야기 할 때에는 건강이라는 객관과 나의 편안함이라는 주관이 함께하니 ‘물과 사람 이야기’는 객관의 눈으로 주관을 보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사람의 이야기 이니 각자의 주관적 사고가 제일이다.
‘물 반 고기 반’은 그물이나 낚시로 물고기를 잡을 때 물고기가 많다는 즐거운 표현이고 ‘물 반 사람 반’은 한여름 수영장이나 해수욕장에 피서객이 너무 많아 불편한 표현이니 물과 사람이 반과 반을 이야기 할 때에는 많은 주관과 객관이 따로 또 같이 섞이리라.
융복합의 시대를 지나 무경계의 시대를 준비하는 요즈음, COVID19 덕분으로 그 도래시기를 체감하기에도 바쁜 요즈음은 ‘물 반 사람 반’이 되거나 ‘물 반 고기 반’이 되거나 ‘따로 또 같이’가 강조되며 더불어 ‘따로 또 같이’의 경계도 필요지 않은 ‘물과 사람 이야기’, 즉 ‘물사이’를 읽어내 보려고 한다.
-큰 물-
ICT의 눈부신 발전으로 우리의 일상이 크게 달라져있다. 외부의 매체, 개체에서 나임을 인증하는 것은 내 스마트폰이다. 개인의 인식은 물론 경제/사회 활동 전반이 모두 담겨 있다. 나를 기준으로 해서 주변의 물질과 정신적 가치의 최적성은 스마트폰에 의한 기록과 관리 및 중재로 이루어진다.
대형 건물의 보안 및 에너지 관리처럼 큰 돈이 들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일을 제쳐두고라도, 내 이야기인 Home Automation은 꽤 오래 전에 들어본 기술이다.
자율주행차는 곧 내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ICT관리체계 적용이 되어가는 분야가 물관리 사업이다. 소위 ‘스마트물관리’, ‘스마트워터시티 프로젝트’ 등이 그것이다. 물 분자는 지구를 통해 순환한다.
기체, 액체 및 고체로 그 태를 바꾸기도 하면서 성층권의 높은 하늘부터 해저 깊은 곳까지 여러 곳을 다닌다. 물의 순환으로 생명의 원천인 유기물이 만들어진다. 식물의 광합성에 필요한 원소와 에너지가 물과 함께 이동되고 유기물이 만들어지고 축적되며 또 다른 개체로 순환된다. 이 들의 순환을 가이드 하는 일은 지구에 쏟아지는 에너지와 사람의 편리를 위해 사용되는 에너지의 몫이다.
물과 사람 사이의 적정이 무너지는 일은 결국 편리와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려는 사람의 욕심 때문이다. 사람의 욕심에 의해 만들어지는 불균형은 소위 ICT 물관리를 통해 관리한다지만 이 역시 인간중심 관점이라는 한계가 있어서 물순환을 공유하는 다른 생물과 생태계를 포용하기에는 먼 이야기 이다. 생물과 더불어 어울리는 생태계가 없는 인간의 물관리는 단지 사람중심의 따로 노는 물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물이 사람의 물이 된다면 이물은 결국 반쪽의 물이 될 것이다.
‘치산치수’와 함께 큰물관리는 토목의 분야로 간주되어 왔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매우 오래된 분야의 전공이다. 인류의 농경시대를 지나며 자본주의를 낳게 한 중요한 인류의 기술이다.
농경에 의한 자본의 축적은 장기간 저장이 가능한 곡물류의 생산으로 비롯 되었고 이를 가능하게 한 기술은 치수 기술이다. 곡물을 가진 자본가는 노동을 제공하는 고용자와 물관리의 가치에 대한 차이를 가지게 되면서 재물에 대한 서로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으나 물의 사용량이 워낙 적었던 시절이라 자원의 고갈문제는 없었다.
농경에 의한 자본의 축적은 산업혁명을 지나 공업에 의한 자본가의 생성으로, 그리고 풍족한 자원을 기반으로 한 인구의 증가와 함께 더욱 거대해지는 자본으로 인하여 수자원의 고갈은 양과 질의 면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제 큰 물은 토목의 분야에서 환경의 분야로 넘어가고 있다.
-작은 물-
산소 한 분자와 수소 두 분자가 물분자를 구성하고 있다. 산소는 물의 16배가 되니 수소를 1로 친다면 물은 18의 크기가 되는 셈이다. 산소가 워낙 크니 물분자에서의 수소는 선택의 여지 없이 산소에 붙어 있는 꼴이 되어 전자가 모자란 +의 전하를 띠게 된다.
산소 한 분자와 수소 두 분자가 물분자를 구성하고 있다. 산소는 물의 16배가 되니 수소를 1로 친다면 물은 18의 크기가 되는 셈이다. 산소가 워낙 크니 물분자에서의 수소는 선택의 여지 없이 산소에 붙어 있는 꼴이 되어 전자가 모자란 +의 전하를 띠게 된다.
반면 산소는 반대로 –의 전하를 띠게 되는데, 힘이 없는 수소 두 원자가 산소를 중심으로 104.5도 기울어져 붙게 되어 물분자는 소위 극성을 띠게 된다. 이 불균등한 두 원소의 전하 분포로 인해 생명현상이 안정하게 유지되고 있으니 ‘불평등 즉 평등’은 원래 생명의 기원인가 보다.
물의 극성 특성으로 인하여 지질계열(탄화수소, Hydrocarbon)을 제외하고는 물과 반응하지 않는 생체구성 물질이 없으니, 이는 불균등은 불균등을 알아보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일을 수행함과 다르지 않다. 이 조화로운 노력을 통하여 생명의 생리 반응이 원활하게 일어난다.
탄화수소는 원소 서로의 결합에 있어 특정한 선택의 여지가 있고 없음이 없어 특정하게 기울지 않아 극성을 띠지 않는다. 균등과 불균등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물과 반응하지 않는 지질계열이 세포막을 구성하게 되어 경계를 이루며 생물의 특정대사를 관장하는 효소가 구분되어 반응을 조정한다. 물은 반응하지 않는 성질까지도 생명의 기본을 이루게 하니 물을 떠나서는 더더군다나 생명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사람의 가치를 경제적으로 표현할 때 그 사람이 거주하는 해당 국가의 경제력으로 산출하기도 한다. OECD 국가의 형편에 따라 US $1,000,000 ~ $10,000,000 정도로 계산이 되기도 하며 생리적 기능으로 활성 되는 생물학적 자원의 가치도 유사하다.
아주 오래된 미국드라마의 원조 격 중 하나인 ‘육백만불의 사나이(Lee Majors)’는 이미 그 가격을 알았나 보다. 그러나 해부학적 관점에서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로 평가할 때는 70%에 가까운 물의 가격 덕분으로 US $1 정도 근방이다.
우리가 마시는 생수로 치자면 조금 더 비싸겠지만 경제적, 생물학적 가치에 비교하여 이정도 차이는 의미가 없다. 작은 물의 가치가 그러하다. 큰 물에 비교하여 그 쓰임새와 덕목의 기준에 따라 그 가치의 차이가 매우 큰 원소이다.
이 가치 차이에 따라 개인 삶의 질과 양이 크게 변하니 싼 물이라도 절대로 우습게 보아서는 아니 될 일이다. 물은 개인의 유전자적 특성에 따라 나만의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중간물-
지하로부터 물을 구하기 위해 우물을 사용해서 올릴 경우 펌프에 ‘마중물’을 사용한다. 펌프에서 이 마중물은 지하수와 지표수 사이에 놓이기 때문에 중간물이라고도 한다. 펌프에 소량의 중간물을 부어야 지하수와 물의 응집력과 부착력을 연계하여 중력을 거슬러 물을 올릴 수 있다. 얻기 어려운 많은 물을 얻기 위하여 소량의 중간물을 소모한다.
지하로부터 물을 구하기 위해 우물을 사용해서 올릴 경우 펌프에 ‘마중물’을 사용한다. 펌프에서 이 마중물은 지하수와 지표수 사이에 놓이기 때문에 중간물이라고도 한다. 펌프에 소량의 중간물을 부어야 지하수와 물의 응집력과 부착력을 연계하여 중력을 거슬러 물을 올릴 수 있다. 얻기 어려운 많은 물을 얻기 위하여 소량의 중간물을 소모한다.
그러나 이 소량의 중간물은 때로 불필요한 물과 연계되어 불필요한 재원을 대량으로 소모하게 한다. 건강하지 않은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인하여 중간물이 엉뚱한 물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과유불급의 물생산 산업에 사용되는 많은 재원은 다음세대를 위한 자원과 에너지의 낭비로부터 생산된다.
우리나라에서 수돗물을 그대로 음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국민학교 시절 땀을 쏟은 체육시간 후 운동장의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벌컥거리며 물을 마시던 시대는 더 이상 아니다.
지역에 따라 정수기술과 배수관, 수질의 변화 때문에 그 수돗물을 마시지 않는 논리보다는 ‘인문학적 상상력’ 덕분의 논리이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은 공포홍보를 이겨내는 건강한 과학적 논리를 키우지 않는 점이다.
특히 건강에 관한 공포홍보에 연계되는 인문학적 상상력은 모든 상식을 초월한다. 음식물, 채소 및 과일을 통하여 섭취하는 다양한 미생물은 무시하고 비싼 비용을 들여 미생물은 물론 염류까지 제거된 물을 생산해서 마셔야 안심이 되는 사람이 많다. 건강과 연계된 물에 관한 홍보는 생각보다도 과장되어 있다. 큰 물과 작은 물의 과학적 사실에 친숙해지면 중간물의 과장에도 내 상상력은 건전하고 건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