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의 아늑한 송림과 저무는 갈대밭 기행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대의 물결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별똥별이 희망의 새알을 그린다는 동짓날 겨울이다. 다가오는 새해를 맞아 희망을 부추기려는 마음으로 걷기여정에 불을 지핀다. 금강 하구에 자리한 충남 서천군의 장항읍 송림과 한산면 신성리 갈대밭을 향해 떠난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대의 물결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현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는 중천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맑은 빛이 서해안을 가득 채워놓은 가운데 바다는 시름시름 졸고 있고, 드넓은 갯벌의 백사장은 빗살무늬를 이룬다. 때마침 간조대인지라 갯벌의 온전한 실체가 그대로 드러난다. 장항 갯벌은 지역 주민들이 대대로 이어온 생업의 터전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갯벌의 효과는 우리 몸의 노폐물을 걸러주는 콩팥과 같이 바다의 오염을 정화해 주는 탁월한 기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바다가 인간에게 베푸는 선물은 무한정이다.
갯벌의 배경으로 송림 산림욕장의 숲길이 이어진다. 숲 입구서부터 소나무가 사열하듯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있다. 알뜰한 손길 없이 자랐음에도 적당한 간격을 유지해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를 비워둔 의젓함이 고풍스럽다. 차디찬 겨울이 와 있는데도 푸른 송림은 의구한 자태를 잃지 않고 굳건한 젊음을 과시하고 있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그윽한 솔 향이 코끝으로 밀려든다. 향기가 어찌나 진한지 서울 남산의 소나무 숲과 경주 삼릉 숲의 차별화가 느껴질 만큼 특별함이 전해온다.
포근한 날씨를 보여주는 아늑한 바닷가로 이동한다.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그룹이 형성되어 푹신푹신하게 젖은 백사장을 걸으니 발바닥을 통해 전달되는 편안함이 너무 좋다. 해안선이 침식되어 수백 년은 족히 지났을 아름드리 소나무 뿌리가 그대로 드러내 있어 일부 바닷가가 훼손되어 있는 곳도 있고, 자연 친화적으로 대처하여 연안정비가 잘 된 곳도 있어 눈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환경 파괴 현상과 국가 차원에서 적절하게 대응한 모범 사례를 동시에 비교할 수 있는 현장학습을 체험한 셈이다.
백사장 끄트머리에서부터 해안선의 허리를 휘감은 목제 테크인 보행로를 따라 걷는다. 마치 물 위를 걷는 기분이다. 제멋대로 휘어진 구불구불한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바다 냄새가 저절로 콧속을 파고든다. 꿈 같은 시간들이 쏴아아 지나간다. 시원하게 뻥 뚫린 바다를 곁하며 걷는 사이 마음 속 답답한 것들이 한 줌 먼지처럼 사라진다.
생태탐방로 해안가로 접어드니 다시 소나무 숲이다. '철새 나그넷길'로 명명된 테마파크는 자연 오솔길로 조성되어 있다. 여름날 바닷가 백사장을 걸었던 기분을 겨울철 산속 송림에서 체험을 한다. 송림을 헤집고 얼마쯤 걸어갔을까. 바다가 보이는 곳에 튼실한 기둥이 떠받쳐주는 전망대로 발걸음을 옮긴다. 꼭대기 너른 곳에는 일행들이 바다와 송림을 배경으로 연신 기념사진 찍느라 한바탕 북새통을 이룬다.
장항 스카이워크로 입장하여 꽈배기 꼬듯 돌고 돌아가는 나선형 계단을 오른다. 하늘을 날면 이런 기분일까. 송림 숲을 가로질러 바다로 이어지는 250m의 스카이워크로 걸어가는 맛은 시큼한 과일을 먹은 것처럼 온몸이 짜릿짜릿하다. 이곳 스카이워크는 신라가 당나라 대군 20만을 격파하여 승리로 이끈 기벌포 해전의 전설이 전해오는 곳으로 '기벌표 해전 조망대'라고 불린다.
버스를 타고 30분은 족히 이동한 것 같다. 신성리 갈대밭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갈대 7선에 속한 곳으로 더러는 전국 3대 갈대밭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며 추켜세우기도 하는 곳이다. 갈대밭 입구를 중심으로 로컬푸드가 진열된 임시 장터에서 억척스러운 시골 아낙네들이 물건을 팔기위해 입에서 후끈후끈한 단내를 뿜어대며 오가는 길손의 시선을 잡느라 야단들이다. 무심한 듯 그냥 지나치기도 힘들다.
갈대밭 절정은 늦가을 은빛 갈대가 필 때 가장 아름답다. 하지만 봄을 제외한 여름, 겨울에도 나름 계절적 운치가 있다. 지금 겨울철인데도 단체 탐방객을 맞느라 절찬리에 유명세를 치르는 중이다.
금강으로 향하는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삭풍에 흔들리는 갈대 잎새 사이로 금강 물살이 언뜻언뜻 보인다. 그 물살 위로 반짝이는 햇살의 실루엣까지 보면 절세비경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모퉁이를 돌자 겨울바람이 갈댓잎을 휩쓸고 지나간다. 사람 키보다 큰 갈대밭의 미로에서 동행을 찾아 헤매다가도 유명 시인의 시가 걸린 곳에서는 마음을 느긋하게 풀어놓고 카메라를 들이댄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비무장 지대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기도 한 이곳, 어쩌면 바람결 따라 갈라지는 갈대를 통해 이념적 이데올로기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 속에서 남과 북의 병사들이 긴장이 오가던 분위기와는 다르게 지금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삶의 원동력을 찾은 것처럼 즐거움에 한껏 들떠있다.
비경에 취해 잊고 있고 있던 시장기가 갑자기 몰려든다. 예약된 맛 집은 1998년 폐교된 옛 연봉초등학교이다. 옛날 그대로인 교실에 들어서면 그때는 작은 줄 몰랐던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다. 어릴 적 아련한 추억 을 끄집어내어 동심 어린 그리움에 젖는다. 교실 한편에 걸린 ‘냠냠 먹자방’이라는 갈숲식당의 알림문구가 재미있다. 갖가지 반찬은 필요할 만큼 정갈하게 담겨 있는 게 남도 음식 못지않게 맛깔스럽다. 토속 막걸리 한 잔 곁들인 진지한 분위기 속에 먹는 즐거움이라니, 침묵의 시간을 지배하듯 모두가 먹는 것에 취한 것 같다.
어느덧 하루해는 저물고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할 버스에 몸을 싣는다. 피곤에 지쳐서일까, 차안은 온통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하다. 차창너머로 희끗희끗 보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젖는다. 올해도 이제 한 주일만 지나면 사라져갈 터이다. 한 해의 성과가 새해에 품은 소망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 내 생의 버킷리스트 목록 중 기행수필집을 상재한 것으로 금년 한 해의 꿈을 다 이룬 것 같이 뿌듯함이 생겨난다. 살아 있음이 새삼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