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기억하는 아차산

2020-09-17     김무홍

 

아차산은 고구려를 기억하며 1500년 묵은 시간을 이고 눌러앉은 산이다. 남한에서 고구려의 유적을 찾기가 녹록하지 않은 만큼 한강을 끼고 우뚝 솟은 아차산의 위상은 그만큼 존재감이 높을 수밖에 없다. 새삼스레 고구려의 사연을 보태고자 하는 의미는 민족의 자긍심과 문화의 자부심을 불러일으켜 준 과거의 영화를 보상받고 싶어 하는 고구려의 시간을 되돌아보기 위함이다.

마중 나온 소나무 숲의 인도를 받아 고구려의 이야기가 구석구석 녹아있는 아차산 품으로 들어간다.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산길은 숱한 역사의 자취가 배어있는 곳이다. 이 길을 오르내리며 지나간 시간만큼 켜켜이 쌓였을 아련한 사연 하나씩 들추어낼 수 있겠다는 기대를 걸자 발걸음이 가볍고 설렘으로 일렁인다.

덥수룩한 수풀에 묻힌 아차산성이 유장한 세월 속에서 잠자는 듯 웅크렸다가 가까이 다가서자 위용을 드러내며 이야기의 서막을 올린다. 산성 내부는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지만, 이곳에서 극적인 인생 역전을 이루고 장렬하게 전사한 고구려 장군 온달과 고구려 평원왕 딸 신분으로 상대의 사회적 지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온달과 파격적으로 결혼한 평강의 온기가 전해온다.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고구려를 알아보기 위한 느슨한 오르막이 이어진다. 오후가 느리게 넘어가다 낙타고개 쉼터에 이르러 햇살이 맥을 못 추고 그늘을 내주었다. 쉼터에는 발 빠른 계절이 통째로 차지하며 가을을 꿰자고 눌러앉는다. 하늘에서는 맑은 빛이 내려와 누리를 감싸며 바람결 따라 하늘거린다. 몸은 가을을 타고 자연의 완연한 결정체에 동화되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만한 시절이 또 있겠나 싶다. 하필이면 이 시절 이곳에 있는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라도 가을 한복판에서 자유로운 계절을 느끼고 누릴 수 있다면 혜택이고 특권이다.

고구려의 흔적은 고도를 높여 갈수록 더해진다. 등허리를 허옇게 드러낸 널따란 바위 위로 팔각 형태의 고구려정이 가장 고구려다운 모습으로 위용을 자랑한다. 두툼하게 단련된 근육질의 너럭바위는 용맹했던 고구려인들의 기품을 대변한다. 팔각정 안으로 가을 나는 소리가 맑은 빛을 타고 눈부시게 부서진다. 요즘 같은 시절에 가을 나는 정취는 너무나 아늑하기만 하다. 가을 나는 정취는 달빛 어린 늦은 밤도 좋고 찬 서리 내리는 이른 아침이나 땅거미 짙어 스산해지는 예지랑날에도 좋다. 가을 나는 정취는 다 좋지만 이 순간 온몸으로 잦아드는 정취가 으뜸이다.

모르는 사람과 마주치는 눈인사에서 따스함이 전해온다. 소담하게 길을 밝혀주는 들꽃 응원이 더해져 산길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정상을 쉬이 내어준다.

 

이미지제공 - 박미애 사진가

 

하늘과 가장 가까운 아차산 보루에는 그 옛날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하게 싸우다가 어질러놓은 듯 막무가내로 파헤쳐진 돌무더기와 더불어 유물 파편이 아무렇게 나뒹굴러 있고 이름 모를 잡초만이 휑하게 불어오는 소슬바람에도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과거 역사를 자국 위주로 확대하여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알려지면서 주변 나라로부터 거센 반발을 일으킨 바 있다. 이는 한반도의 고구려 영역까지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여 한반도가 통일할 경우 영토 분쟁을 차단하려는 중국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우리 역사 무대는 작고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늘 당하기만 하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자신을 비하하며 부정하기 바쁜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대륙 중원에서 통쾌한 역사를 써가며 강력했던 고구려가 있었기에 그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주변 강대국으로 흡수되지 않고 반 만 년 유구한 한민족의 정통성을 이어왔다는 점은 오히려 내세울 만한 역사이다. 중국의 무모한 동북공정 패권에 맞서 발해와 고구려에 대한 역사가 우리 민족의 뿌리와 같다는 엄연한 사실에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를 기억하며 높은 관심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 논리 개발이 시급한 실정이다.

역사는 어제와 오늘처럼 내일을 향해 가없이 써 내려간다. 살아있는 나무에 뿌리가 있듯 민족과 역사는 혼연일체 불가분의 관계이다. 고구려 역사의 대부분이 북녘에서 쓰였고, 유물 또한 자리하더라도 하나의 한반도 역사에 불과하다. 그런 인식에서 고구려를 기억하며 잠들지 않은 아차산을 새롭게 눈여겨보아야겠다. 아차산에 아무렇게 버려진 하찮은 고구려 유물 조각마저도 허투루 다루거나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고 나면 모두가 소중한 우리의 자산이고 역사여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