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 이름 하나 붙여주세요 - 서울 안산행
흐리지만 후덥지근한 열기 뿜어내는 날씨입니다. 어제 문학회 지인들과 저녁에 만나 늦게까지 진지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니 먼 산으로 가기에는 녹록하지 않은 시간입니다. 가까운 안산 숲길로 발길을 돌립니다.
독립문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안산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자락길 사거리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한숨을 고르며 정상인 봉수대쪽으로 갈 것인지 둘레길로 갈 것인지를 선택합니다. 바로 이곳 숲속에 내가 ‘삐죽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습니다. 우람하게 불끈 솟아 있는 남근석!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것이 있는지를 모르고 지나쳐 갑니다. 바위가 나뭇가지에 가려있기도 하고, 이 바위의 존재를 알리는 표지문 같은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안산 자락길은 산책로가 잘 정돈되어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이 바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산에 있는 남근석과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은 바위이니 전설 같은 얘기들을 적은 표지문이 있을 법도 한데 말입니다. 안산길을 수년간 다녔다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지나가면서 내가 남근석 사진을 찍는 모습을 호기심 있게 지켜보며, 이런 모양의 바위가 있었느냐고 반문을 합니다. 하긴 나도 안산을 수차례 오르내리면서도 그것을 찾지 못하다가, 어느 날 여기 나뭇가지에 가려진 이 바위를 불현 듯 발견하고 얼마나 당황했던지.
나는 문화란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총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니까 태어나서 먹고 자고 배우고 활동하고 죽는 생물학적인 삶과, 살면서 만들고 누리고 버리는 개인과 집단의 행태와 의식구조, 제도와 가치 및 도덕과 신앙 등을 포괄하는 모든 것의 총체가 되겠습니다. 물론 이 개념이 지나치게 넓다는 지적이야 감수할 일이지만 애써 축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전에 버려져 지금은 잊힌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문화가 비밀스럽게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남근석이 뭐 길래 호들갑이냐고요? 오해하지 마시라.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시대 밑바닥에 깔려있는 성 풍속과 다산의 기원 같은 원초적인 시대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 풍속을 음란한 일로 치부하여 공론의 장에서 지워버리면 생명의 진화와 인류 역사의 진실 일부를 도려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거칠고 열악한 생존조건에서 본능적으로 생명을 유전하려고 했던 선사시대 사람에게 성은 다산을 통해 유전의 임무를 다 하려했던 열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선사인의 문화적 DNA는 역사시대로 이어져 도처에 남근과 여근을 묘사한 암각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신라토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른 부분보다 유난히 큰 남근을 볼 수 있는 것도 놀랄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서울에도 남근석과 여근석, 그리고 그들 바위에 새긴 전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인왕산 국사당 언저리에는 선명하게 갈라진 여근바위가 있는데, 지금도 촛불을 켜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삼성산 삼막사 칠성각 옆에는 아예 남근석과 여근석이 나란히 서있는데, 여근석에 돈을 붙여 떨어지지 않으면 자손을 본다는 등 일화도 풍부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찾아간다는 것은 신비롭고 재미있는 원형문화의 수수께끼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과 같습니다.
예전에는 이 삐죽바위 앞에서 제를 지내며 다산과 풍요를 기원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때의 흔적이 바위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안산 삐죽바위를 나뭇가지 뒤에 숨겨놓지만 말고 이름표를 달아주면 어떨까? 신화와 전설이 있으면 더욱 멋진 기념물이 되지 않을까요. 점잖은 서대문구청장님과 시민 여러분! 이 멋진 바위에 딱 맞는 참한 이름 하나 붙여주세요!
봉원사로 내려옵니다. 이 절도 예외 없이 한국 사찰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찰에 가면 통상 세 개의 전각을 만납니다. 부처를 모신 대웅전, 부처의 말씀을 두루 전한다는 범종각, 그리고 삼성각(혹은 칠성각, 삼신각 등과 같은 유사한 이름으로도 부름)이 그것입니다. 특히 삼성각은 토속신을 모신 곳인데, 이는 불교가 수입되는 과정에서 토속신앙과 큰 마찰 없이 정착할 수 있었던 완충적 상징물로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적 증거이기도 합니다.
봉원사는 신라 진성여왕 3년(889년)에 도선국사가 현 연세대 터에 창건하여 반야사라 했는데, 조선 영조 24년에 지금의 터로 이전하면서 친필로 ‘봉헌사’라는 이름을 현액한 사찰입니다. 그런데 이 절을 돌아보며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 현대사와 관련된 일입니다. 바로 이곳이 갑신정변과 한글학회의 요람이기 때문입니다. 개화파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동인 스님이 5년간 수도했고, 김옥균 등 개화파 주요 인사의 왕래와 회합이 왕성했던 곳이었습니다. 또한 1908년 8월 31일 국어연구학회(현, 한글학회) 창립총회가 열린 곳이기도 합니다.
안산은 서울 도심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시민에게는 편안하게 길을 내어주고, 덤으로 신화와 역사의 이야기까지 솔솔 전해주고 있습니다. 다정한 벗과 같은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