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담가 잘 익힌 장맛 - 춘천 금병산행
잘 담가 잘 익힌 장맛
- 춘천 금병산행
맑고 깨끗한 햇빛이 한강으로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물비늘 냄새가 한강대교로 치고 올라오는 아침, 용산역으로 걸어가는 발길은 날렵하고 흥겹기만 합니다. 용산역은 배낭을 멘 사람들로 바글바글합니다. 경의중앙선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수많은 무리가 열차를 타고 떠나갔지만, 인파는 결코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 속에 나도 있습니다. 꼬리를 물고 들어서는 사람들이 툭툭 부딪치며 지나가도 시빗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무심히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여행을 떠날 때는 각박함도 야박함도 버리고 가나 봅니다. 나도 그러면 좋겠습니다. 9시 발 경춘선 ITX청춘을 기다리며.
열차 안은 시끌시끌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여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잠을 청해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눈만 감고 있어도 덜 피로하고 때로는 풀리기도 합니다. 10시 15분 경 남춘천역에 도착했습니다. 남부시장 앞 버스정류소로 걸어갑니다. 원창고개로 가는 버스 (2, 40, 41, 43)를 타기 위해서 입니다. 지방 도시의 버스는 서울처럼 자주 오지 않아 느긋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이 여행의 시작이요 마무리입니다. 30여 분을 기다려 40번 버스를 탈 수 있었습니다. 원창고개는 춘천에서 홍천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춘천 최고봉 대륜산에서 기세 등등 뻗어 내린 산줄기가 수리봉과 금병산 사이에 길을 내어 주었습니다. 오늘 산행은 여기서 시작하기로 합니다. 가자, 금병산으로.
등산로 입구에서 오솔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발바닥으로 부드럽게 전해오는 기분 좋은 감촉을 느끼며, 병풍처럼 펼쳐진 신록의 산길입니다. 떨어진 낙엽이 흙이 되고, 그 위에 또 낙엽이 쌓여 만든 비옥한 숲입니다. 잣나무숲 우거진 길가에 핀 작고 앙증맞은 꽃이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싱그러운 새소리. “그래, 이곳은 너희들의 낙원. 나는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우리 낯설어도 함께 걸어가는 친구가 되자.” 하늘 높이 쭉 뻗은 잣나무에서 기분 좋게 뿌려주는 향이 콧등을 스칠 때면, 바람도 나도 어느새 산 중턱까지 와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상수리나무 숲길입니다. 가을이면 떨어진 상수리가 지천으로 널려 있습니다. 예전엔 상수리를 주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요즘은 그걸 주어가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상수리로 만든 묵맛은 일품이지만, 산에서 상수리를 직접 주어 묵집에 공급할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정상에 올랐습니다. 정상표지석은 전망대 옆 왼쪽에 납작 숨어 있습니다. 기름진 육산이다 보니 나무가 웃자라서 산 아래 시야를 가리자 전망대를 설치했습니다. 전망대에 오르면 호반의 도시 춘천시의 아름다운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금병산은 딱히 튀는 봉우리는 없어도 세상 볼 건 다 보고 있습니다. 산길 또한 각진 곳이 없으니 야박하게 사람 가려 받지 않습니다. 심성이 후덕한 산입니다.
참나무 새순이 연초록 터널 같은 그늘을 만들면, 나는 그 길을 따라 김유정문학촌이 있는 실레마을로 갑니다. 이 마을은 금병산에 폭 안겨있는데, 김유정 생가 뒷자락 산길은 온통 잣나무숲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 길은 예전에 들병이들이 넘나들던 길이라고 합니다. 들병이는 병에 술을 담아 가지고 다니면서 파는 들병장수를 말합니다. 마을과 마을을 떠도는 장사치가 있고, 술이 있으니 어찌 이야기가 쌓이지 않겠는가? 김유정, 그의 문학은 이런 배경의 터에 싹트고 피어났습니다. 그는 당시 농촌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삶을 그려냈습니다. 그의 소설은 토속적이고, 투박하고, 질펀한 입심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잘 담가 잘 익힌 장맛! 오늘 그 맛을 보고 싶습니다.
김유정의 고향 실레마을은 금병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습니다. 실레마을이란 이 마을의 지형이 마치 옴폭한 떡시루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실레는 시루의 강원도 방언입니다. 김유정은 1908. 1. 11. 이곳 실레마을에서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김유정은 몸이 허약하고 소심했으며 말더듬이였습니다. 말더듬이는 자라면서 고쳐졌다고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이는 그의 가족사와 연결해서 보면 심리적인 요인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유정 생가를 둘러봅니다. 생존 당시의 시대와 농촌의 생활수준을 감안하면 넉넉한 집터입니다. 그렇습니다. 김유정의 가계는 대대로 이곳 마을의 땅을 대부분 소유한 대지주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문은 평판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과격한 성격으로 인해 자식들과 갈등이 많았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인심을 잃었습니다. 기록은 없지만, 김유정이 연희전문에서 제적당하고 이곳으로 돌아와 야학을 열어 농촌 계몽운동을 벌인 것도 선대들의 악덕에 대한 속죄의 의식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해봅니다.
김유정은 평생을 병마에 시달렸습니다.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갔으나 결석이 잦아 두 달 만에 제적처분을 받고 말았습니다. 사랑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명창 박녹주를 향한 구애는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는 실연의 아픔을 묻고 1931년 이곳으로 귀향하여 '금병의숙'이란 야학당을 열어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일선」,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노다지」 등의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우직하고 순박한 주인공과 토속적인 언어들을 맛깔 지게 담아 넣은 그의 작품은 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당시 이곳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구사했던 언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언어학적 가치도 충분합니다.
김유정은 글쓰기에 더욱 몰입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글쓰기를 놓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 자신도 죽음이 그렇게 빨리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죽기 10개월 전에도 박봉자란 여성에게 30통의 구애의 편지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반응이 없었고, 이후 김유정과 친분이 있는 문학평론가 김환태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1936년 폐결핵과 싸우면서 세상을 뜨기 전에 「야맹」, 「옥토끼」, 「생의 반려」, 「정조」, 「슬픈 이야기」, 「따라지」, 「땡볕」, 「연기」 등을 발표했습니다.
하늘도 이 천재의 재능을 시기했습니다. 김유정은 병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1937. 3. 29. 다섯째 누나 유흥의 집에서 삶을 마감했습니다. 29세의 짧은 생애였습니다. 사람은 떠났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작품들은 세대를 거듭하여 살아갑니다. 그의 작품이 우리 곁에서 살아 있는 한 그도 함께 살아 있는 것입니다. 작가는 작품과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938년 삼문사에서 단편집 『동백꽃』을 출간했습니다. 동백꽃은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빨간 동백꽃이 아닙니다. 강원도 사람들은 이른 봄에 피는 산수유 꽃처럼 생긴 노란 생강나무 꽃을 동백꽃 또는 산동백이라 불렀습니다. 실레마을을 병풍처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금병산에 올해도 동백꽃은 피었습니다. 내년에도 피고, 다음 해 또 다음 해에도 필 것입니다.
김유정역 근처 식당가에 들러 춘천이 자랑하는 닭갈비와 막국수는 먹기로 했습니다. 여행의 즐거움 중의 하나가 현지 음식을 맛보는 일 아니겠나. 먼저 닭갈비와 막국수로 맛을 보고, 우동사리, 볶음밥 순으로 배를 채워가노라면, 세상사 고민하면서 살 일이 뭐 있겠나 싶습니다.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는 김유정역으로 저녁을 알리는 금병산 그림자가 시나브로 포근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