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포가 전하는 말 - 춘천 삼악산행
폭포가 전하는 말
- 춘천 삼악산행
강촌교를 건너 등선봉 능선 입구에서 입산하려던 당초 계획을 변경하였습니다. 등선폭포 입구로 이동하여 산에 오르기 위해서입니다. 갈증을 심하게 느끼는 답답한 시절인지라 힘차게 활강하는 폭포의 물줄기를 먼저 보고 싶습니다. 물 맑은 강촌에도 가뭄의 여파는 피해갈 수 없나 봅니다. 젊은 시절 강촌에 올 때면 눈이 시리도록 파랗게 넘실거리던 강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강촌역은 강물 위에 떠있었습니다. 경춘선을 타고 강촌역에서 내려 삼악산 등선폭포와 봉화산 구곡폭포를 걸어서 가곤 했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강촌역이 봉화산 가까이에 생겼고, 옛 강촌역은 레일바이크역으로 바뀌어 지역 관광 시설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가면 변하는 것이 세상 이치라지만, 젊은 시절 완행열차를 타고 왔던 강변의 강촌역은 추억의 낡은 숨을 몰아쉬고 있습니다. 추억도 나이가 드는 것인지?
강물의 흐름도 시류의 흐름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의사당은 몇 달째 개점휴업 중입니다. 선량들은 멀쩡한 의사당을 비워두고 거리로 나가 말싸움에 여념이 없습니다. 곧 국회가 열린다는 말이 들리기도 하는데 언제 열릴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다 똑똑하고 말도 잘 하는데, 왜 만나면 으르렁거리며 쌈질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너무 잘나서 그런 건가요? 서로 다른 정치적 신념이 그렇게 만드는 건가요?
코를 맞대고 앙칼지게 노려보는 각진 절벽 사이에 폭포가 있습니다. 등선폭포~승학폭포~백련폭포~옥녀담~비룡폭포~주렴폭포로 쉼 없이 떨어지는 물줄기는 패기가 살아있습니다. 봄기운을 담은 물소리는 우렁차고 신났습니다. 꼬장꼬장 맞선 절벽이야 다투거나 말거나, 지네들 힘겨루기 하거나 말거나,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는 즐겁기만 합니다. “그래, 싸울 때 싸우더라도 물길만은 터놓아야지. 그래야 맑은 물에 눈도 씻고, 귀도 닦을 수 있는 게지. 그러잖아도 골치 아픈 세상에서 다 저 잘났다고 기세 등등 싸우기만 하면 누가 알아주기나 한답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본채 만채 합니다. 골을 스치는 바람도 물소리와 어울려 신명나는 한바탕 놀다가는 세상에서, 잡스럽게 떠들며 싸우는 그 소리가 귓전엔들 눈썹엔들 스치기나 할까?
코를 맞대고 앙칼지게 노려보는
각진 절벽 사이로 폭포가 있다
쉼 없이 떨어지는 물줄기
봄기운 받아 우렁차고 신났다
꼬장꼬장 맞선 절벽
다투거나 말거나
한 판 두 판 힘겨루기하거나 말거나
폭포는 즐겁기만 하다
그래, 싸울 때 싸우더라도
물길만은 터놓아야지
그래야 쉬엄쉬엄 맑은 물에
눈도 씻고 귀도 닦을 수 있는 게지
저 잘났다 기세등등하여 싼들
바람도 물소리도 어우러져 신명 나는 세상에서
그 소리 그 몸짓이
귓전엔들 눈썹엔들 스칠까
(졸시, 삼악산 폭포가 전하는 말, 전문)
폭포를 오르는 계곡 중턱에 조그마한 절이 있습니다. 흥국사입니다. 왜소한 이 사찰이 삼악산성지의 중심이라고 합니다. 삼한 시대 맥국의 성터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태봉의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나 이곳으로 피신하여 절을 짓고 군사들과 머물렀다는 대궐터가 있었다고도 합니다.
권력을 잃고 쫒기는 처지에 이곳에 대궐을 짓고 왕 노릇을 했다는 것이 얼른 납득이 되지 않기도 합니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면, 권력을 다 빼앗기고 한 목숨 부지하기도 위태로운 궁예가 대궐을 지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권력을 다시 찾으려는 꿈을 꾸었을까? 이 깊고 험한 산속에서 영원히 은둔할 수 있기를 바랐을까? 미륵세계의 부활을 열망했을까?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라는 책자에서 이미 패자가 되어버린 이야기는 거칠게 떨어지는 폭포수의 물결에 부서지고 흩어져 그저 사라질 뿐 말이 없습니다.
흥국사부터 정상까지는 계속해서 돌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333계단이라고도 합니다. 산은 땀을 흘려야 정상인 용화봉을 내어준다고 합니다. 어찌 땀 없이 이루어지는 대가가 있으리오. 용화봉에 오르면 발 밑이 의암호입니다. 의암호 푸른 물에 떠있는 섬들이 마치 녹색 운동장처럼 보입니다. 의암호 가운데쯤 붕어처럼 생긴 섬이 붕어섬입니다.
춘천 시내의 전경은 의암호 건너편에 있습니다. 의암댐을 건너면 바로 드름산입니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의암호를 바라보는 풍경은 삼악산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의암댐은 바로 삼악산과 드름산 사이의 협곡을 막아 건설했습니다. 의암댐을 건너면 강변을 따라 철골 기둥을 박아 만든 길이 길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 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보이고 있습니다. 나도 저 길을 몇 번 걸었는데, 마치 물 위를 걷는 감흥이 느껴졌습니다.
이제 내려가야겠습니다. 하산은 세 개의 길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북서쪽은 삼악성터로 이어진 등선봉 길입니다. 춘천에서 가평을 거쳐 서울로 왕래했다는 석파령이란 역로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동북쪽으로는 상원사로 가는 능선입니다. 모두 험하고 위험한 암벽길입니다. 지금 올라온 등선폭포가 하산하기엔 가장 편안한 길이라고 하는 산객들이 많은데, 내가 보기엔 어느 길이나 큰 차이는 없는 듯합니다. 조금 더 많이 걸었던 길인만큼 익숙한 기분은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여러 길이 있는데 왔던 길로 뒤돌아 갈 수는 없지 않는가? 상원사 쪽 능선을 택했습니다. 이 길은 험하지만 의암호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길이기에 눈이 즐거운 길입니다. 이렇게 험하고 각처에 낙석의 위험마저 복병처럼 숨어 있는 길을 많은 사람들이 오르는 것은 기암괴석으로 이어진 칼 같은 능선과 나무가 만들어 낸 자연의 경이로운 생명력이 충만한 길이기 때문일 듯합니다.
거목과 바위가 서로 손을 잡아 길을 만들고, 고사목도 자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신성한 까마귀가 날아와 노래하니, 사뭇 아름다운 하모니가 흐르는 길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의 삶도 이러면 좋겠습니다. 눈 한 번 질끈 감았다 뜨는 것이 한살이라 하는데, 눈 부릅뜨고 코 맞대고 앙칼지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산과 호수는 언제나 제자리에서 다투지 않고 살아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