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년 만에 되살아난 궁중의 빛 — ‘일월오봉도 병풍’, 첫 공개
왕의 권위와 정신, 그리고 예술의 숨결이 깨어났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새롭게 단장한 <궁중서화> 상설전시실을 개방하며, 조선 왕실의 상징이자 궁중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일월오봉도 병풍>과 <강남춘의도 병풍>, 그리고 역대 왕들의 어필각석과 인장 등 왕실 서화의 명품을 한자리에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11월 11일부터 시작되며, 보존과학의 성과와 미디어아트를 결합한 새로운 방식으로 왕실 문화의 품격을 재조명한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는 해와 달, 다섯 개의 봉우리, 소나무와 파도가 어우러진 조선 왕권의 상징이다. 국왕의 뒤편에 병풍처럼 세워져 왕의 존재를 신성하게 드러내던 그림으로, ‘왕은 천지와 함께 있다’는 정치적 상징성을 품고 있다.
이번에 공개되는 <일월오봉도 병풍>은 창덕궁 인정전을 장식했던 것으로, 1964년 복원 당시 설치된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풍의 봉황도와 서수도가 대체되었다가, 원형 복원 과정에서 다시 본래의 위용을 되찾았다. 2016년부터 2021년까지 6년간 국립문화유산연구원 문화유산보존과학센터의 정밀 보존처리를 거쳐,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또 하나의 걸작, <강남춘의도 병풍(江南春意圖屛風)>은 중국 강남의 봄 경치를 상상으로 그린 작품이다. 부드럽고 따스한 색조, 수려한 수목과 고요한 수면, 그리고 섬세한 붓놀림이 조선 궁중 화풍의 여유와 낭만을 보여준다. 강남은 조선 문인들이 이상향으로 삼았던 곳으로, 19세기 궁중에서도 그 문예적 풍류가 유행했다.
이 병풍은 2022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구입한 뒤, 장황(粧䌙)을 안정화하는 과정을 거쳐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인다. 단순한 그림이 아닌, 조선 왕실이 꿈꾸었던 문화적 이상이 담긴 회화다.
조선 왕실에서 서화는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통치철학의 표현이었다.
왕은 글로써 세상을 다스리고, 시로써 신하와 교감했다. 새롭게 꾸며진 전시실에는 역대 왕들의 글씨를 새긴 **어필각석(御筆刻石)**과 현판이 함께 전시되어, 왕의 필력과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특히 태조의 어필각석, 선조의 현판 등은 서체의 강건함과 기개를 보여주며, 헌종과 고종 대의 어필은 세련되고 유려한 궁체의 완성미를 드러낸다.
왕실의 문화적 세련됨은 글씨뿐 아니라, ‘인장(印章)’에서도 확인된다.
헌종이 직접 수집하고 정리한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은 왕실 인장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헌종은 선대 왕들의 인장을 모아 책으로 간행하며, 인문적 교양과 예술적 취향을 함께 드러냈다. ‘보소당’은 그의 당호로, 당시 왕의 개인적 수집 취향이 얼마나 섬세했는지를 보여준다. 비록 1900년 덕수궁 화재로 많은 인장이 소실되었지만, 고종 대에 다시 모각된 유물들이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과 만난다.
관람객은 왕의 문구가 새겨진 인장을 시전지에 직접 찍어보는 체험도 할 수 있어, 단순히 ‘보는 전시’가 아닌 ‘참여하는 궁중문화’로 구성됐다.
이번 전시의 또 하나의 묘미는 미디어 콘텐츠다.
전시 입구에서는 <요지연도(瑤池宴圖)> 속 서왕모의 잔치 장면이 영상으로 구현되어 관람객을 궁중의 연회로 초대한다. 전시장 안쪽에서는 <십장생도>, <연지도>, <죽석도> 등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궁중서화가 미디어 아트로 재해석되어, 전통과 현대의 감각이 한 공간에서 조화를 이룬다.
국립고궁박물관 정용재 관장은 “<궁중서화>실의 새 단장은 단순한 재배치가 아니라, 조선 왕실이 남긴 서화의 예술적·철학적 깊이를 오늘의 언어로 새롭게 해석한 결과”라며 “왕의 정신이 깃든 서화가 국민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왕의 글씨 한 획, 붓끝의 흔적, 그리고 병풍의 색감 하나까지 조선의 미학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기회다. 권위 속의 품격, 권력 속의 예술 — 조선왕실이 남긴 ‘품격의 미’를 통해 우리는 다시금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