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도 피한 안동 광흥사 응진전,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 지정
조선 중기, 두 차례의 화마가 사찰을 휩쓸었다. 대웅전과 주요 전각이 모두 사라졌지만 단 하나, 중심에서 조금 비켜 서 있던 응진전만은 불길을 피했다. 그 이후로 200년 넘게 광흥사의 중심 불전으로 남아온 이 건물은 이제 ‘보물’로 불린다.
국가유산청이 최근 조선시대 사찰 건축의 변천과 불교신앙의 흐름을 보여주는 「안동 광흥사 응진전」을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지정했다. 이번 지정은 단순히 오래된 건물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불전(佛殿)의 변화를 통해 조선 건축사의 한 단면을 새롭게 조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안동 광흥사는 통일신라 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조선 전기에는 불경 간행이 활발히 이루어진 안동 지역의 중심 사찰이었다. 『광흥사중건사적』과 『야운대선사문집』 등 사찰과 관련된 문헌이 다수 남아 있어, 사찰의 위상과 학문적 전통을 함께 보여준다.
응진전은 정확한 창건 시기를 알 수 없지만, 기와에 새겨진 ‘인조 25년(1647)’의 글귀를 통해 그보다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827년과 1946년 두 번의 화재가 발생해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응진전은 사찰 중심부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 화를 피했다. 이후 대웅전을 대신해 사찰의 중심 불전 역할을 맡게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건축적으로 응진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구조로, 조선 중기 다포계 불전 양식을 대표한다. 정면에는 주심포와 주간포를 모두 배치해 입체감을 살렸으며, 측면과 배면은 공포 대신 꽃문양 화반으로 장식해 정면의 위엄을 강조했다. 이러한 구성은 불전 건축의 형식미와 시대적 변화를 모두 품고 있다. 특히 공포의 교두, 삼분두, 운공 구조와 첨차의 연화두형(‘S자형’) 조합은 조선 전기의 전통을 잇되 중·후기로 이어지는 양식적 변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로 평가된다.
응진전 내부에는 16세기 조성된 소조석가여래오존상과 16나한상 일괄(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이 봉안되어 있다. 불상군은 모두 42구로, 일반적인 사찰보다 훨씬 많고 배치 또한 독특하다.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과 나한을 배치한 구성은 당시 신앙의 다양성과 불전 공간의 상징적 역할을 동시에 반영한다.
응진전은 원래 부불전(附佛殿)으로 지어졌지만, 주불전이 소실된 뒤 중심 전각으로 전환된 특별한 이력을 갖는다. 조선시대 사찰 건축 중 이런 사례는 드물다. 건물 규모 역시 부불전 중에서는 큰 편에 속하며, 공포와 천장 구조 등에서 고식(古式) 기법이 남아 있어 건축사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이번 보물 지정으로 안동 광흥사 응진전은 단순한 문화재를 넘어, 사찰의 변천사와 조선 불교 건축미의 변화를 한눈에 보여주는 ‘살아 있는 기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국가유산청은 지방자치단체 및 사찰 측과 협력해 체계적인 보존·관리 체계를 강화할 방침이다.
불길을 피하며 사찰의 시간을 지켜낸 한 건물. 응진전은 ‘남겨진 건축물’이 아니라, ‘남겨야 할 역사’로 다시 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