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마지막 궁중회화 '창덕궁 벽화' 최초 공개
불타 사라진 황실의 벽이 100년 만에 다시 눈앞에 선다. 조선왕실의 마지막 궁중회화로, 창덕궁 내전 희정당·대조전·경훈각을 장식했던 거대한 부벽화 6점과 이를 완성하기 전 그린 초본 1점이 최초로 한 자리에서 공개된다. 이 작품들은 1917년 창덕궁 내전이 화재로 소실된 뒤 1920년 재건 당시 황제 순종과 순정효황후의 생활공간을 장엄하게 꾸미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높이 180-214cm, 너비 525-882cm에 달하는 초대형 화면은 벽을 완전히 뒤덮을 만큼 압도적인 크기이며,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든 궁중미술의 절정이다.
당시 화가들은 벽에 직접 그리지 않고 비단에 그림을 그린 뒤 종이로 배접해 벽에 부착하는 ‘부벽화’ 방식을 택했다. 전통적인 청록산수화풍의 섬세한 필치를 유지하면서도, ‘근사(謹寫)’라는 문구와 함께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는 근대 회화의 특성을 드러냈다. 참여한 이들은 해강 김규진, 이당 김은호, 청전 이상범, 심산 노수현, 정재 오일영, 묵로 이용우 등 당대 한국 근대 화단을 대표하는 거장들로, 황실의 권위와 개인 창작의 자부심이 공존하는 희귀한 기록이 됐다.
희정당에는 김규진이 직접 금강산을 유람하며 남긴 밑그림을 바탕으로 완성한 〈총석정절경도〉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가 걸렸다. 궁중회화에서 금강산은 낯선 소재였으나, 일제가 이를 관광지로 개발하던 시기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산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대조전에는 오일영과 이용우의 합작 〈봉황도〉, 김은호의 〈백학도〉가 마주 서 있으며, 봉황은 태평성대를, 학은 장수를 상징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은호가 〈백학도〉를 준비하며 그린 초본이 최초로 공개된다. 경훈각의 동서 벽을 장식한 노수현의 〈조일선관도〉와 이상범의 〈삼선관파도〉 역시 첫 공개다. 이 두 작품에는 복숭아와 거북을 든 동자, 장수를 자랑하는 세 신선 등 선계의 모습이 그려져 황제 부부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이 벽화들은 창덕궁 내전에 설치된 채 100년을 버티며 세월과 환경의 변화를 겪었고, 2014년 대조전, 2016년 희정당, 2023년 경훈각 순으로 떼어내 보존처리를 마쳤다. 현재 창덕궁 전각에는 모사본과 영인본이 설치돼 있고,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모두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국립고궁박물관은 개관 20주년을 맞아 8월 14일부터 10월 12일까지 2층 기획전시실에서 ‘창덕궁의 근사(謹寫)한 벽화’ 특별전을 연다. 전시는 2부 구성으로, 1부에서 희정당·대조전·경훈각 벽화를 개별 공간에서 세밀하게 감상할 수 있다. 2부는 미디어아트 ‘근사한 벽화, 다시 깨어나다’로, 금강산 절경과 봉황·백학, 신선 세계를 실감형 영상으로 구현해 관람객의 움직임에 반응한다.
전시 기간 동안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3시 전문 해설이 진행되며, ‘왕실문화 심층탐구’ 전문가 강연, 초등학생 대상 체험 프로그램, 성인 대상 현장답사도 준비됐다. 국가유산청과 국립고궁박물관은 이번 전시가 궁궐건축·궁중회화·근대미술의 가치를 한 자리에서 조망할 기회라며, 왕실유산의 의미를 국내외에 확산시키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