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한 방울 없이 생명 구한다, 세포기반 인공혈액 첫 임상 문 열려
피 한 방울 없이 생명을 살리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줄기세포에서 적혈구와 혈소판을 생산하는 ‘세포기반 인공혈액’이 국내에서 본격적인 개발 궤도에 올랐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이 혁신 제품을 ‘첨단바이오의약품’으로 공식 분류하면서, 임상시험과 품목허가를 향한 법적·제도적 문이 열렸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상용화 전례가 없는 영역으로, 혈액 수급 불안과 희귀혈액형 수요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기술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세포기반 인공혈액 개발은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의 일환으로 2023년부터 시작됐다. 총 481억 원 규모로 보건복지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식약처, 질병관리청이 공동 참여한다. 저출생·고령화, 감염병 확산 등으로 인한 혈액 공급 위기 대응이 핵심 목표다. 기술적으로는 줄기세포를 활용해 인체 혈구 성분인 적혈구와 혈소판을 대량 생산, 헌혈 의존 구조를 혁신적으로 바꾸는 것이 골자다.
문제는 기존 규제였다. 국내 ‘혈액관리법’은 인체에서 채혈한 혈구와 혈장만을 ‘혈액’으로 정의하고 있어, 세포기반 인공혈액은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회색지대에 놓여 있었다. 안전성·효과성 평가 기준도 마련되지 않아 임상 진입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다. 해외에서도 상용화 제품이 전무해 참고할 규제 모델이 없었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해 식약처는 2024년부터 ‘규제정합성 검토’ 제도를 적용했다. 기술 개발 초기부터 평가기준·방법·요건을 진단하고, 해당 제품이 어떤 법률과 평가체계로 관리돼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절차다. 세포기반 인공혈액의 사용 목적, 작용 기전, 제품 형태 등을 다각적으로 분석한 끝에, ‘첨단재생의료 및 첨단바이오의약품 안전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른 첨단바이오의약품으로 분류하기로 했다. 이는 기존 혈액 규제 범주를 넘어선 신개념 치료 수단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확보한 의미를 갖는다.
이번 분류 결정은 단순 행정 절차 이상의 파급력을 지닌다. 평가기준에 맞춘 비임상·임상시험이 가능해졌고, 품목허가 신청 경로도 확정됐다. 상용화에 성공하면 대규모 혈액 공급 안정화뿐 아니라 희귀혈액형 보유자, 혈소판 감소증 환자 등 특수 수요층에도 맞춤 공급이 가능하다. 특히 전쟁·재난 상황이나 전염병 유행기에도 안전한 혈액 대체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어, 국가 의료안보 차원에서도 가치가 크다.
식약처는 이번 사례를 ‘규제가 혁신을 가로막는 장벽이 아닌, 개발을 돕는 길잡이’로 전환한 대표적 성과로 보고 있다. 인공혈액 외에도 발달장애 디지털치료기기, 유전자치료제, AI 헬스케어 등 다양한 국가 R&D 혁신제품에 대해 규제정합성 검토를 확대하고 있다. 목표는 명확하다. 첨단·혁신 기술의 가치를 안전하게 상용화해 국민에게 신속히 전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