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부터 경주까지, 8도 8색의 빛의 향연

2025-08-04     정의식 기자

군산 세관 외벽을 타고 흐르는 백 년의 역사, 진주성의 성벽 위를 수놓는 광화(光華)의 물결, 그리고 대릉원 왕릉의 가을 밤하늘을 적시는 천년의 시간. 야간의 국가유산이 미디어아트와 만나 전례 없는 문화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2025 국가유산 미디어아트’가 8월부터 11월까지 전국 8개 도시에서 펼쳐진다. 국가유산청과 국가유산진흥원이 주최하는 이 행사는 단순한 야간 경관 조명을 넘어, 외벽 영상, 몰입형 인터랙티브 체험, 홀로그램 아트까지 디지털 기술의 총체를 담아낸다. 지난해 148만 명이 방문하며 흥행에 성공한 이 프로그램은 이제 하나의 야간 국가유산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가장 먼저 문을 여는 도시는 군산. 구 군산 세관 본관과 조선은행, 근대역사박물관 일대에서는 8월 8일부터 30일까지 ‘군산의 빛, 꽃으로 물들다’라는 주제로 15개 프로그램이 선보인다. 할아버지와 손녀 새별의 시간여행 이야기를 따라 펼쳐지는 ‘백년의 군산’은 외벽 전체를 스크린 삼아 도시의 기억을 시각적으로 복원한다.

뒤를 잇는 진주는 진주성 전체를 감싸는 대규모 미디어 파사드로 ‘법고창신, 진주성도’라는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북을 치면 수로를 따라 퍼지는 빛의 흐름은 ‘영광의 만개’라는 이름으로 관객과 직접 상호작용하며 야간 문화 경험의 몰입을 극대화한다.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 열두 개의 별’이라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무장했다. 열두 개의 별, 여섯 개의 방울이라는 메타포 속에서 대가야의 문화와 권력의 이미지가 현대적 미디어아트로 재구성된다. 고분군이 단순한 유적지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스토리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제주목 관아에서는 ‘펠롱펠롱 빛 모드락’을 주제로 제주의 자연과 공동체 문화를 조명한다. 탐라순력도 속 말을 타는 관리, 귤꽃 흐드러진 마을, 바람이 부는 풍경이 조명과 영상으로 펼쳐지며, 생태와 문화가 교차하는 섬의 정체성을 형상화한다.

철원 노동당사는 분단과 평화를 상징하는 장소다. ‘모을동빛: 걷히는 구름, 비추는 평화’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이번 미디어아트는 과거의 상처를 품은 건축물에 빛을 투사하며 철원의 미래를 비춘다. ‘철원에서 철원(哲園)으로’라는 콘셉트는 지리적 장소를 철학적 공간으로 승화시킨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은 ‘평화의 빛’을 테마로, 세병관 위 하늘에 펼쳐지는 홀로그램 은하수로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300년 조선 수군의 기억과 환상적 기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관객은 평화의 은하수를 마주하게 된다.

양산 통도사는 ‘산문의 빛, 마음의 정원에서 인연을 만나다’라는 주제 아래 인연의 의미를 되새긴다. 천년 고찰의 조용한 정원 속에 투사되는 빛은 스크린이 아니라 마음속 기억의 방에 새겨진다. 명상적 경험과 디지털 기술의 융합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문화유산 향유 방식이다.

대미를 장식하는 도시는 경주. 대릉원은 ‘대릉원 몽화: 왕릉, 천년의 시간을 열다’라는 거대한 서사를 통해, 역사와 예술이 융합된 야외 미디어아트의 정점을 선보인다. 천년 고도에서 펼쳐지는 이 환상적인 미디어 축제는 고분의 형상, 가을밤의 정취, 그리고 첨단 기술이 어우러진 하나의 장대한 무대가 된다.

 

 

2025년 국가유산 미디어아트는 단순한 야간 이벤트가 아니다. 지역 고유의 국가유산을 살아있는 콘텐츠로 되살려, 전 세대가 함께 경험할 수 있는 다층적 문화향유의 장을 제공한다. 공식 홈페이지(www.kh.or.kr/visit)와 인스타그램(@visitkoreanheritage) 등을 통해 자세한 일정과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빛은 국가유산 위에 비추고, 그 빛은 시간을 넘어 오늘의 관객을 과거와 이어준다. 밤이 아름다워지는 계절, 유산은 다시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