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왕실의 시간, 100년을 돌아 조국의 품에…관월당 귀환
1924년, 조선의 왕실 사당 하나가 낯선 땅 일본으로 사라졌다. 정확한 이유도, 정체도, 목적도 모호했던 그 건물은 도쿄를 거쳐 가마쿠라의 한 사찰로 옮겨졌고, 그렇게 조선의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 그 이름조차 생소한 목조건축물 ‘관월당(觀月堂)’이 다시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해외 반출 문화재의 환수는 언제나 복잡하고 긴 협상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번 귀환은 달랐다. 일본 가마쿠라시의 고덕원(高德院) 주지인 사토 다카오(佐藤孝雄)와 한국의 국가유산청,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 신뢰를 기반으로 한 비공식적 협업 프로젝트를 수년간 진행했고, 그 노력 끝에 왕실 사당이 국내로 돌아오는 역사적 장면이 연출됐다.
이 건물의 현재 명칭은 ‘관월당’.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맞배지붕 목조건축물로, 대군(大君)급 이상 왕실 인물을 기리는 사당 양식을 따르고 있다. 학술 조사 결과, 건축 세부 구조에서는 조선 후기 궁궐 및 궁가 건축에서만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다수 확인됐다. 파련대공, 초엽, 초각, 안초공 등은 고위급 건물에만 허용됐던 상징적 장식들이다.
특히 기와 장식은 관월당이 왕실 건축임을 확실히 뒷받침한다. 용문(龍文), 귀면문(鬼面文), 거미문(蜘蛛文), 박쥐문(蝙蝠文) 등이 섞여 있는 암막새들은 궁궐과 관련된 건축에만 사용되던 도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규모는 단출하나 상징은 무거운 건물임이 드러난다.
하지만 관월당이 본래 어디에 있었는지, 누구를 위해 세워졌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상량문이나 금석문 등 건립 배경을 밝힐 수 있는 단서는 2024년 해체 과정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1924년, 조선식산은행이 이를 일본 야마이치 증권 초대 사장 스기노 기세이(杉野喜精, 1870~1939)에게 증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스기노는 관월당을 도쿄로 옮겼고, 1930년대 고덕원에 기증하면서 관음보살상이 봉안된 기도처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번 귀환은 단순히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물을 이동시킨 일이 아니다. 고덕원 주지 사토 다카오는 “건물이 본래 유래한 땅에서 보존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고, 그 결정에 따라 해체부터 운송까지 모든 비용을 자비로 부담했다. 이는 일본 내 종교기관이 조선 왕실 건축물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존중하며 자발적으로 내린 귀중한 문화 외교의 결정으로 평가된다.
해체 과정은 한국 전통 건축 전문가들이 직접 참여해 진행됐고, 단청 기록화, 구조 분석, 재료 감식 등 정밀한 조사 작업이 병행됐다. 특히 단청에서는 운보문(雲寶紋), 만자문(卍字文) 등의 궁궐 문양이 다층의 채색층에 확인되며, 18세기 후반~19세기 후반 사이 반복된 채색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줬다.
한편, 일본 이건 과정에서의 변형도 일부 발견됐다. 관월당의 기단은 일본 도치기현 및 가나가와현의 안산암, 응회암으로 조성됐고, 내부는 비어 있는 상태로 조선 양식과 차이가 있었다. 지붕 구조 또한 덧지붕 형태로 적심과 보토 없이 시공됐으며, 외벽 일부는 몰탈과 자갈을 혼합한 화방벽 구조로 변경됐다. 이는 방화와 내후성을 위한 일본식 개조로 보인다.
현재 관월당의 모든 부재는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전통건축수리기술진흥재단 수장고에 보관 중이며, 한국 내 복원 및 전시를 위한 체계적인 수리 작업이 곧 착수될 예정이다.
관월당의 귀환은 문화유산을 매개로 한 국제 협력의 상징으로서 평가된다. 국가유산청은 “이 사례는 문화재의 환수가 단순한 귀속의 문제를 넘어 상호존중과 협업을 통해 이뤄진 모범적인 사례”라며, 앞으로 관월당의 정체성 복원을 위한 학술조사와 함께 국민과 함께하는 문화자산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고덕원 측은 이번 협업을 계기로 한일 문화유산 교류의 장기적 지원을 위해 별도의 기금을 조성해 국외재단에 기부할 방침이다.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광복 80주년이라는 상징적 해에 이뤄진 관월당의 귀환은 과거의 상흔을 넘어 미래 지향적 문화연대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