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한복판 너구리, 사람과 공존 가능할까

2025-06-12     이치저널(each journal)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건너고, 쓰레기봉투를 헤집으며 나타나는 야생 너구리. 더 이상 숲속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 도시에 출몰하는 야생 너구리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사고와 민원이 잇따르고 있다. 이에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이 야생 너구리와의 공존을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에 나섰다.

국립생물자원관은 수도권 일대 야생 너구리의 유전적 특성과 행동권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수도권 너구리 생태 현황 지도'를 올해 하반기 완성해 지자체 등에 제공할 예정이다. 너구리 출몰로 인한 로드킬, 물림 사고, 질병 확산 등의 문제를 예방하고 장기적으로는 체계적인 관리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실제로 도심 속 야생 너구리는 단순한 구경거리나 일회성 소동에 그치지 않는다. 서울시 집계에 따르면, 2021년 81건이던 너구리 관련 사고는 2024년 117건으로 증가했다. 특히 광견병과 개선충증 같은 감염병 전파 가능성도 우려된다. 개과 동물인 너구리는 외부 기생충이나 바이러스 감염에 쉽게 노출되며, 이를 통해 도시 생태계나 반려동물에까지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번 생태 현황 지도 제작에는 16개의 초위성체 마커(유전적 지표)가 활용됐다. 수도권 전역에서 채집된 226개체를 분석한 결과, 이 너구리들은 인천·서울서부·경기남서부, 서울 강서·양천·구로, 경기북부 등 세 개의 독립된 개체군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너구리의 평균 행동반경이 1㎢ 이하로 매우 좁고, 도시의 도로망이 서식지를 분절시키는 주요 요인이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도심 내 생존력이 강한 너구리는 복잡한 골목과 하천, 녹지공간을 따라 이동하면서 사람과의 접점을 늘려가고 있다. 국립생물자원관은 개체군 분포와 핵심 서식처, 이동경로, 갈등 발생 지점 및 질병 유입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해 현황 지도를 구축 중이다. 이 자료는 지자체의 야생동물 대응 정책 수립에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전망이다.

유호 국립생물자원관장은 “도시에서 야생동물과의 갈등은 이제 일상적 현상이며, 그만큼 과학적이고 정밀한 관리가 필요하다”며 “이번 연구는 사람과 야생동물이 서로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수도권 너구리 개체군의 유전적 구조 지도(초위성체 마커)

 

도시 너구리의 등장은 단순한 생태 변화가 아니라, 도시 공간 자체가 자연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들과의 거리를 두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안전하고 건강하게 공존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