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산행은 따뜻했다 - 북한산 승가사행
동지 산행은 따뜻했다
- 북한산 승가사행
연말이 되니 송년회란 명분으로 술자리가 많다. 꼭 이렇게 술을 마시며 송년회를 해야 하나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막상 참석해서 오랜만에 만나 권하는 지인의 잔을 거절하기도 예의가 아닌 듯해서 이래저래 잔을 부딪치다 보면 과음으로 빠지기 일쑤다. 을 하게 된다. 어제도 그랬다. 너무 많이 마셨다. 아침에 눈을 뜨니 입안이 얼얼하고 아직도 술냄새가 콧등을 스친다. 밀린 일을 정리하느라 조금 늦게 갔다. 하지만 늦게 간다고 술 적게 마신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오판이다. 후래삼배니 뭐니 해서 오히려 짧은 시간에 드는 잔이 잦으니 더 힘들다. 술 없는 연말모임? 그게 잘 안 되니 그게 문제로다. 우야든동 북한산에 오르며 찌든 술독이라도 빼야겠다. 휴~~~
문수사 쪽에서 구기계곡을 따라 승가사를 향해 올라간다. 날이 푹해 눈이 녹았는지, 비가 왔는지 길이 축축하다. 동지에 날이 춥고 눈이 많이 오면 다음 해에 풍년이 들고, 온화하면 질병이 돈다는 말이 있는데 맞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그나저나 이런 말이 어디서 나왔을까? 얼른 떠오르는 생각은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다음 해 봄 가뭄 걱정이 덜하니 풍년이 들 듯도 하건만, 질병까지 예견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오랜 농경 생활을 통해서 인류가 관찰하고 체득한 지식 같은 것일까? 최근 몇 해를 돌아보면 질병이 심심찮게 창궐했다. 언뜻 사스와 메르스, 조류 독감이 떠오른다. 이때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돼지 열병’으로 수많은 돼지들이 살처분 당하기도 했다. 혹자는 지구가 온난화 되면서 잠자고 있던 전염병을 깨웠다고도 한다. 또 혹자는 인간의 자연 파괴가 불러온 재앙이라고도 한다. 문제는 글로벌 시대라는 말처럼 전염병이 발생하면 국경과 대륙을 넘나들며 빠른 속도로 무섭게 전파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염병도 세계화의 물결을 타나보다. 새해에는 또 어떤 전염병이 출현할지 불안한 세상이다.
동지가 지나면 곧 새해다. 어쩌면 자연계의 새해는 동지가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지금이야 달력이 새해를 알려주는 시대이지만, 이를 알 리가 없는 생명들이야 동지가 지나면 낮이 길어지고 움츠렸던 생명도 눈을 뜨는 시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리라. 원시인류도 그 정도였을 것이다. 동지를 지나면 조만간 새싹이 돋는다는 사실. 모든 것을 자연에 의지하고 살던 시기에 그것은 희망의 시작점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했을 듯하다. 새 생명이 잉태하고 있으며, 죽은 생명이 대지의 기운을 받아 부활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강한 희망과 믿음은 신앙이 되었을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 원시종교인 미트라교(Mithraism)는 동지에 축제를 벌였다. 최고의 신인 태양이 오래도록 자신들을 지켜주고, 만물을 생산할 수 있으니 태양신이 기쁘게 오실 수 있도록 숭배의 축제를 올려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연결고리는 로마로 이어졌다. 로마인은 새턴(Saturn)이라는 농업신에게 추수감사의 축제를 올렸다. 새턴네리아라고 한다. 매년 12. 21 ~ 31일까지였다. 로마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로마인은 예수님의 탄신일을 기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성서의 어디에도 예수님의 탄신일에 대한 기록이 없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믿음의 원천이다. 상상력이 풍부했던 로마인은 자신들의 전통 축제인 추수감사의 축제기간 중 동지 다음날인 태양 부활일을 예수님의 탄신일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일도 동지의 일화가 있다는 점이 참으로 흥미롭기만 하다.
승가사에 도착했다. 목이 마르다. 절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샘을 찾았다. 술 마신 다음날엔 물을 많이 마시고, 더군다나 산행까지 하니 더욱 많은 물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실수였다. 가져온 물은 이미 다 마셔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찾은 대웅전 앞마당 한쪽에 있는 샘은 얼어 있다. 할 수 없이 절 주방에 가서 물을 청했다. 차가운 물을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마시고, 빈병에 물을 채우고 주방을 나오는데, 여 스님이 검은 비닐주머니를 쥐어 준다. 무엇인지 여쭈어보니 팥죽이란다. 스님들 드시는 음식을 제가 축내야 되겠냐며 사양하니 스님들은 다 드셨다며 두 봉지를 더 주신다. 같이 온 사람들과 함께 드시란다. 하긴 달랑 컵라면 하나에 보온물만 가져왔고, 그나마 그 보온물도 이미 다 마셔버린 터라 사실 컵라면도 먹을 수 없는 처지다. 고맙다고 합장 인사를 하며 염치 불구하고 받아 들었다. 검은 비닐주머니를 통해 따뜻한 팥죽의 온기가 전해지고 있다. 북한산 동지 산행은 따뜻했다.
어젯밤 송년회서 과음을 하였더니
아직도 술 냄새가 콧등에 달라붙어
북한산 잔바람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술 없는 연말모임 할 수도 있을 텐데
생각은 해봤다만 실행이 잘 안 되니
북한산 올라가면서 술독이나 빼야지
동짓날 비가 내려 산길은 촉촉하고
날씨는 온화하여 눈마저 녹았으니
모처럼 구기계곡에 물소리 생기롭다
해동의 기운이야 더 없이 반갑다만
동짓날 따뜻하면 질병이 돈다 하니
덧없는 괜한 걱정이 여린 가슴 스친다
승가사 도착해서 물 한 잔 부탁하니
스님은 팥죽까지 먹으라 권하신다
귀신도 이 팥죽 맛을 피해가진 못하리
한 사발 붉은 팥죽도 나누면 넉넉한데
동짓날 꼭 눈 오고 추워야 풍년인가
북한산 동지 산행은 이미 풍년 들었소
(졸시,“동지 산행”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