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들의 속사정이 우화가 되어 - 양평 남한강길
수만 년을 한강이 실어온 비옥한 토지를 일구며 살던 1300여명의 주민은 왜 죽어야 하는지 물어보지도, 이유도 알지 못하고 전쟁의 희생물이 되어 귀한 목숨을 잃었다
민초들의 속사정이 우화가 되어
- 양평 남한강길
양평전통시장을 지나 남한강 강변에 들어서니 파란 강물에 쓸려온 나뭇가지 위에서 흰 두루미 한 마리가 평화롭게 앉아 가을 햇볕을 쬐고 있다. 미물의 나뭇가지도 새에게는 따사로운 쉼의 터전이 되어주는데, 어찌하여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은 잔혹하기만 한가? 양근대교 밑에 이르자 '6.25양민학살현장비'가 서있다. '통곡의 그날(장삼현 작)'이란 시가 당시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선량한 양민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그 옆에는 평화를 갈망하는 '구' 모양의 조형물(김태곤 작)이 있다. 구 모양은 폭탄과 총알을 상징한다. 1950년 9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급격히 바뀌었다. 다급하게 후퇴하던 인민군은 양평 주민 600여명을 학살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어 양평 지역을 수복한 국군은 인민군 점령 시기에 부역했다는 혐의를 씌워 주민 700여명을 학살했다. 수만 년을 한강이 실어온 비옥한 토지를 일구며 살던 1300여명의 주민은 왜 죽어야 하는지 물어보지도, 이유도 알지 못하고 전쟁의 희생물이 되어 귀한 목숨을 잃었다. 전쟁은 광기를 정당화시키고, 광기가 지배하는 집단은 무슨 일이든 한다. 당시 한강의 백사장과 떠드렁산을 지배했던 두 집단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통곡의 그날
- 6.25학살당한 영령의 명복을 빌며
이유도 없었어라 영문도 몰랐어라
고귀한 생명들이 철사로 꽁꽁 묶여
석유불 생지옥 속에 한 덩어리로 엉켰어라
선량한 수백명은 총성에 스러지고
비명은 공포 속에 지하로 스며드네
통분한 말 한마디 할 순간조차 없었어라
수중에 잠겨버린 시신들은 어디 갔나
백사장 집어삼킨 강물만 출렁이네
아직도 붉은 깃발은 북넠에서 날리는데
양평읍 남한강변 떠뜨렁산 또 백사장
생생한 학살현장은 기억조차 흐려지네
원혼은 강변을 돌며 통곡하고 있구나
장삼현(경원대학교 교수)
잔혹사는 더 있다. 양근리 오밋다리 부근과 관문골에서는 잡혀온 수십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 당했다. '영원으로 가는 사다리' 조형물만이 당시 양평(양근) 천주교 순교자들을 영원의 세상으로 인도하고 있다. 이념이나 신앙이 제아무리 중한들 어찌 생명만 하단 말인가? 나는 악마를 본 적이 없지만, 만약 악마가 있다면 이념과 신앙의 명분으로 생명을 해코지 하는 자라고 믿는다.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지만, 만약 있다면 이념이나 신앙의 가치보다 작은 생명 하나라도 구하고 보살피는 자라고 믿는다. 은빛 물비늘 반짝이는 맑은 남한강물에 더 이상 참혹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서는 안 되겠다.
고산정에 오르면 남한강 가을의 절경과 만난다. 고산정은 팔당댐이 건설되어 지금은 섬이 된 떠드렁산의 다른 이름이다. 떠드렁산은 용문산 끝자락에 있는 봉우리라는 설도 있고, 충주에서 떠내려 온 산이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어찌되었든 이 떠드렁산에는 기막힌 이야기가 또 있다. 바로 청개구리 이야기다. 조선 시대 인조반정의 주역이었던 이괄의 이야기가 청개구리 이야기로 각색되어 전해지고 있다니?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괄은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반대로 했다고 한다. 이괄의 아버지는 용의 기운을 타고 났기에 죽으면 거꾸로(얼굴이 땅을 보게) 묻어야 용으로 승천할 수 있는 운명이었다. 이괄의 아버지는 이곳 떠드렁산이 용으로 승천할 수 있는 길지임을 알고 자신의 가묘를 만들었다.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이괄의 아버지는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이괄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반대로 할 것이라는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똑바로(얼굴이 하늘을 보게)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버지가 죽자 이괄은 마지막 유언만은 차마 어길 수 없다고 생각하여 아버지의 시신을 똑바로 묻어드렸다. 그래서 결국 이괄의 아버지는 용으로 승천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괄은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광해군 때(1622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던 중, 신경유의 권유로 인조반정(1623. 3월)에 가담하여 큰 공을 세웠다. 반정이 성공한 후 이괄은 한성부판윤과 포도대장을 거쳐 평양병사 겸 부원수에 임명되었고, 윤 10월에 실시한 공훈도 정사공신 2등에 책정되어 불만이 쌓였다. 설상가상으로 1624년 1월에는 반역의 무고까지 받아 조사관으로 내려온 선전관과 의금부도사를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 이를 ‘이괄의 난’이라고 한다.
결국 이괄의 난은 실패했고, 이괄은 부하 장수에게 살해되었다. 이괄의 난이 실패한 것은 이곳 떠드렁산에 아버지의 시신을 똑바로 묻었기 때문에 용으로 승천하지 못해 아버지의 가호를 받을 수 없어서라는 이야기다. 양평 지방에서 전해오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청개구리 이야기로 윤색되어 전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이곳에서 모진 핍박을 받으면서도 삶의 터전을 지키고 일구며 수 세대를 살아온 민초들의 속사정이 우화가 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