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중하기에 - 여성봉과 오봉

우리들의 삶도 언젠가는 추억이 되고, 누군가에 의해 재현되어 변화된 여러 모습으로 재구성된다

2020-11-23     차용국

 

 

무엇이 중하기에

- 여성봉과 오봉

 

 

 

여차하면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입니다. 그래도 길을 나서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독립문역에서 송추행 버스(704번)에 올랐습니다. 좌석은 이미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로 빈틈이 없고, 익숙한 음악이 흐르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애창했던 '그대로 그렇게' 입니다. 기사님을 슬쩍 살펴보니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입니다. 한 시절을 함께 했고, 지금도 함께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잔잔한 동질감을 형성하는 게 삶인 듯싶습니다. 그러니 고등학교라는 울타리에서 함께했던 친구들과 산행을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가자, 친구들아 여성봉과 오봉으로. 고딩답게 빡세게 올라보자.

 

우이령 입구 버스정류소에서 내려 송추마을 뒷산 오솔길을 걸어 오봉탐방지원센터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울대습지부터 들러 봅니다. 여러 해 산길을 걸으며 산속 습지를 볼 때면 늘 신비로운 감흥에 빠지곤 합니다. 자연의 경이로움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곳 습지는 자연 습지는 아닌 듯합니다. 울대란 말은 이곳이 있었던 울대리 마을에서 유래합니다. 이 습지는 울대리 마을 사람들이 경작하던 논을 습지로 개발했습니다.

 

여성봉으로 올라갑니다. 제법 가파른 능선입니다. 능선 옆으로 바위틈에 뿌리 내린 소나무의 생명력은 여전히 강하고 푸르기만 합니다. 원초적 생명의 경이로움이 풍부한 산길입니다. 드디어 여성봉에 올랐습니다. 송추마을과 오봉의 전경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여성봉은 오봉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오봉도 여성봉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여성봉과 오봉은 건널 수 없는 깊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기만 합니다. 짙은 그리움이 흐르는.

 

함께 할 수 없는 애틋한 연정이 단풍이 되어 계곡을 채우고 있습니다. 흐르는 계곡물은 그리움에 젖은 눈물이요, 바람은 그리움이 전하는 마음이요, 붉은 단풍은 그리움에 빗어낸 한 많은 전설입니다. 옛날 한 여성을 사랑했던 오형제는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는 여성의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죽을힘을 다해 일을 합니다. 여성 또한 아버지의 처분을 애타게 기다리기만 합니다. 하지만 여성의 아버지는 한 해 두 해 혼사를 미루며 오형제의 힘을 빌려 부만 쌓을 뿐이었습니다. 덧없이 세월이 흐르고 기다림에 지친 여성은 병이 들어 죽어서 여성봉이 되었고, 오형제는 오봉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비극의 근원은 욕심입니다. 결국 자신과 남의 소중한 사랑마저 파멸로 몰아가는 것이 과욕이라고 산은 보여주고, 들려주고 있습니다.

 

계곡이 깊고 깊어 건너지 못 하였나

벼랑이 가로막아 오르지 못 하였나

애틋한 연정만 품고 마주보고 있구나

 

계곡을 흐르는 건 그리운 눈물이요

바람이 전하는 건 사무친 마음이라

그 곱던 단풍 마디에 한이 서려 있구나

 

세상사 사랑으로 한바탕 사는 것을

무엇이 중하기에 그리 욕심 부리셨소

그와 나 소중한 사랑 영영 맺지 못하게

 

(졸시, 여성봉과 오봉, 전문)

 

 

여성봉에서 오봉을 바라보면 네 번째 봉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개의 봉은 감투를 쓰고 있는 형상입니다. 전설은 이어집니다. 여성의 아버지는 오형제의 힘을 시험하기로 합니다. 산꼭대기에 가장 큰 바위를 올려놓는 자에게 딸을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오형제는 커다란 바위를 들고 산꼭대기로 향했습니다. 오형제 중 사형제는 산꼭대기에 바위를 올려놓았습니다. 하지만 넷째는 힘이 부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넷째 봉만이 감투을 쓰지 못한 채 있다고 합니다.

 

북한산과 도봉산은 잡봉이 적고, 화강암의 하얀 큰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 절제된 기상의 참맛을 맛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용현계곡을 따라 도봉산역 쪽으로 하산하는 길은 편안한 사색의 길입니다. 여성봉과 오봉에 관한 전설은 사뭇 애틋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여성봉과 오봉의 이야기는 도봉산 기슭에서 전해지고 있는 오래된 전설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전설은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근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분명합니다. 이 봉우리가 여성봉란 이름으로 불린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성봉과 오봉의 전설은 현대판 만들어진 이야기인 셈입니다. 신화니 전설이니 하는 것도 이렇게 만들어지곤 합니다. 일단 만들어진 다음에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끝없이 재현되고 변화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전설도 사람들이 창작하고 덧붙여 재구성한 여러 버전 중의 하나인 셈입니다.

 

신화와 전설의 중요한 가치는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시대와 장소를 넘나들며 흐르는 인류 보편의 초월성에 관한 통찰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언젠가는 추억이 되고, 누군가에 의해 재현되어 변화된 여러 모습으로 재구성되어 전해지는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